제 680 호 [책으로 세상 보기] 가장 중요한건 눈에 보이지 않아
가장 중요한건 눈에 보이지 않아 누군가 내게 모자를 보여준다면 나는 보아 뱀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그런 대답을 할 수 없을 것 이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사회는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그 생각은 고정적이기 때문에 내게 모자는 그저 모자일 뿐 보아 뱀이라는 대답은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왕자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책 속에서 어른들에게 어린왕자가 그림을 보여주며 무섭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무섭지 않다고 이야기하기 급급했고, 어린왕자는 보아 뱀의 뱃속에 코끼리가 있는 모습을 그려 보여주고 보아 뱀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춰라,’ ‘가서 공부나 해라.’ 라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어린 왕자는 ’그래서 나는 여섯 살 때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말았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린왕자와 우리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는 어린 시절부터 ‘어른 말에 말대꾸하면 안 된다.’ 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말대꾸의 기준은 무엇이고, 왜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말대꾸의 기준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이 타인이 듣기에는 말대꾸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 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말대꾸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면서 말을 아낄 것을 강요받아온 것일까? 말이란 본디 생각과 여러 추론 과정을 통해 나오는 산물 중의 하나가 아닐까. 말을 아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을 멈추고 주어진 사고를 가지고 대화를 하고, 사회를 구성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 속의 어린왕자도 결국 어른들의 사고에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림과 다른 것이 아닌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한 결과 한 아이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벗어난 우리의 현실 역시 다르지 않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까지 어른들은 ‘사’가 들어가는 직업을 좋아하고, 초등학생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하면 대통령과 우주인이 되고 싶다는 옛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물론 사회의 발전에 따라 아이들이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들의 꿈이 변화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아이들의 꿈이 변화한 것에 결코 어른들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들의 입김에 의해 입맛에 맞추어진 꿈을 가진 아이들을 사회의 꿈과 미래라고 하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모순적인 모습이다. 결국 우리 사회는 어른들의 꿈과 미래라는 의미와 무엇이 다른가. 이런 사회와 어른들에게 지친 어린 왕자는 정말 ‘어린’ 왕자로 남기로 한 것이 아닐까. 자, 이제 우리의 선택이 남았다. ‘어른’ 왕자로 남을 것인가. ‘어린’ 왕자로 남을 것 인가. 엄유진기자
제 680 호 [기자석] 노동자 없는 ‘AI 강국’ 가능할까
문재인 대통령은 10월 28일 인공지능 콘퍼런스 ‘데뷰(DEVIEW) 2019’에서 “IT 강국 넘어 AI 강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혈압 증세로 쓰러진 독거노인이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살려달라고 외쳐 이를 119로 연결한 사례를 들면서 인공지능이 고령화 사회의 국민 건강, 노인 복지, 여성 안전, 범죄 예방 등의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인공지능은 인류의 동반자”라며 ‘AI 강국’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인공지능은 독거노인을 구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 곳곳에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도 하다. ‘편의’를 위해 인공지능이 노동자를 대체하고 있지만 인공지능이 가져오는 편의는 노동자의 편의가 아닌 자본가의 편의이다.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갈취하는 것이 어떻게 편의가 될 수 있나. 임금지출을 줄이고 사회적 책임에서 도피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한국도로공사의 직접고용을 주장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가 “없어지는 직업인 것이 보이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이는 AI 예찬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예언했다. 기업의 효율적 기업 운영, 그리고 이에 무비판적인 정부는 노동자들을 위협에 몰아넣는다. 기업과 정부는 독거노인을 살렸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로 노동문제 전반을 숨기고 있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장병규 위원장은 11월 1일자 중앙일보 인터뷰를 통해 ‘사람 없는 혁명’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인지 자백했다. 그는 “스타트업에 주 52시간을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가 나서서 개인의 권리를 뺏는 거다”라며 주 52시간 근로제를 비판했다. 이어서 자신이 과거 주 100시간씩 일하며 1세대 벤처기업을 일으켰고 현재 1조원 대 자산가가 되었다는 성공신화를 늘어놓았다. 그는 4차 산업 시대에서는 생산수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생산수단이 없어도 자산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4차 산업 시대에는 노동자는 없다. 그렇다면 장병규 회사의 직원들은 노동자가 아니고 고용주는 자본가가 아니란 말인가? 지식으로 ‘생산’한 상품을 대량 제작, 유통하는 것은 ‘생산수단’이 아니면 무엇인가?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조차도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혁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야할 시점이 왔다. 그럼에도 4차산업혁명은 정재계는 물론 고등교육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손쉽게 인력을 공급받기 위해 대학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대학 당국과 대학생은 살아남기 위해 그 구조 안으로 편입될 뿐이다. 4차산업혁명을 가르치는 교육에서는 놀랍게도 노동자가 없다. 모두가 지식을 통해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수단’이고, 경영가이자 자본가이다. 교육에서는 기술과 경영만 강조될 뿐 그 안에 사람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거세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면 노동자가 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발간한 ‘일의 미래 글로벌 위원회 보고서>’는 “노동자의 기본권, 적정한 생활 임금 보장, 일하는 시간의 제한,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 환경, 전 생애에 걸친 사회보장, 숙련 향상을 위한 평생 교육, 좋은 일자리”를 증진할 수 있도록 “기술 변화를 관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기술 발달로 소수 자본가 계급이 부를 쉽게 독점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고, 기술이 사회적 평등에 기여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노력은 기업과 시장이 하지 않는다. 정부가 이를 이끌어야 하고 교육은 고민하고 비판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AI 강국’이 된다면 대다수의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생계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다면 4차산업혁명에 최적화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도 낙오자가 될 뿐이다. 정부는 인공지능을 인류의 동반자로 만들고 싶다면, 이대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해람 기자
제 680 호 [교수칼럼] 구속은 창작의 조건이다
건조한 공학전공자로서의 삶을 사는 가운데, 내 일상 속에 동기부여이자 활력이 되어주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약 20여년간 꾸준히 연주해 온 색소폰이다. 나의 색소폰 연주 분야는 소프트 재즈 색소폰이라고 할 수 있다. 원곡의 이야기 속에, 소프트한 재즈를 가미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가는 연주를 소프트 재즈라고 한다. 아마추어 색소폰 연주활동을 하면서 항상 가슴에 담고 있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화려한 연주 테크닉도 빠른 손놀림도 아닌, 어떤 곡을 연주하기에 앞서, 가장 단순한 기본기, 즉 호흡과 리듬 그리고 박자를 매일의 연습 가운데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즈만큼 연주자의 개성과 연주자가 바라보는 또는 느끼는 곡에 대한 느낌이나 해석이 자유로운 장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재즈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무대를 유심히 바라보면, 한가지 눈치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재즈니까, 즉흥연주니까 생각조차 못하고 있던 악보라는 것이 덜커덩 놓여있다. 그런데, 그 악보는 거의 비어 있고 멀리서 본다면 그냥 백지나 조금 끄적거린 것 같은, 무언가 쓰다만 것 같은 악보처럼 보인다. 게다가 연주자들은 연주하는 동안 이 악보를 보통의 연주자들이 보는 것처럼 집중해서 악보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악보는 재즈 연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곡의 중심이 되는 멜로디와 코드(화음)이 적혀있고, 재즈 연주자들은 각각의 멜로디의 중심과 화음의 범위 안에서 자유로운 연주를 하게 된다. 이런 한장 또는 두장 짜리 악보를 리드시트라고 한다. 재즈에서 들려지는 자유로운 연주는 바로 이 리드시트에서 철저하게 약속한 멜로디와 리듬과 화음이 서로를 배격하지 않는 가운데 어쩌면 사전에 철저히 훈련되고 약속된 그루부를 형성한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2015년에 미국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허비행콕과 칙 꼬리아가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도대체 무슨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듯한 몽롱한 연주 가운데 이 둘의 무대는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멜로디를 다른 이야기로 그려가고 있다는 것을 추상적인 관점에서 점증적인 방법으로 알아갈 수 있는 연주로 이어져갔다. 딱 한장의 리드시트에 맞춰진 두 사람의 합주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리드시트는 멜로디의 가장 기본이 되는 투파이브원(2-5-1)으로 구성되는 가이드톤이 있고, 재즈로서의 맛을 잘 살릴 수 있는 텐션과 도미넌트 5음 체계를 적용해서 멋진 즉흥연주(임프로비제이션)를 구사해 내게 하는 기본 원칙이다. 철저한 규칙안에서 최대의 자유 혹은 한계를 뛰어넘는 화합의 새로움을 누릴 수 있는 재즈 연주의 원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러한 자유는 규칙이라는 범주안에서 최대의 강점을 갖게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이 곧 자율이라는 개념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최근에 손으로 무엇을 만들기 보다는 기계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창작해내는 일에 익숙하다. 특히 3D 프린팅, 컴퓨터 캐드, 일러스트 등이 보편화 되면서 더욱 일상적인 일이 되어 가고 있다. 과거의 건축이나 디자인 양식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매우 획일화 되어 있었지만, 최근 컴퓨터와 3D 프린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면 상상의 한계는 없어 보인다. 단순한 형상에서부터 형이상학적이고 기이한 문양과 양식이 자유롭게 연출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명확한 한 선이 있는데, 정확한 가이드 라인을 지키지 않으면 상상은 그저 상상일 뿐, 작가 또는 제작자의 꿈은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기이한 모양을 디자인해서 출력물을 얻으려고 한다면, 기계의 작동의 규칙뿐만 아니라 그래픽 또는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인 도형의 생성에 관한 조건이나, 3D 프린터 출력 조건이 지켜져야만 구현이 된다는 것이다. 즉, 무제약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절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최근의 우리의 일상에서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기계나 로봇은 재즈적인 관점에서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무한한 가능성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필연적인 자기 규제적인 법칙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예술가에게 더욱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화법을 완성하기 전까지 거장 밀레의 그림을 수도 없이 모사했고, 그의 규칙을 자신의 것으로 규칙화해서 습작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만이 갖는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즉, 기존의 규칙 속에서 임프로비제이션화 된 자신만의 그림은, 자신의 화법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철저한 가이드 라인과 자신의 그림의 독창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텐션과 꾸밈의 조화가 이루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구속 또는 규칙은 획일적이거나 통제라기 보다는, 고유성과 확장 가능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양문 형식의 통로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 통로는 공명(또는 공감)되는 새로운 조화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발전적 원리일 수 있다. 염기원 교수 (휴먼지능로봇공학과)
제 680 호 [사설] 헤아림의 결핍, 헤아림의 미덕
사회가 빠르고 복잡하게 변화할수록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합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가치의 충돌로 인해 사람들의 감정이 격앙된 탓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세상은 더 넓어졌으나 시야는 더 좁아진 느낌이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현명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가치의 실종 시대에 모두가 극도로 피로한 상태인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은데 가슴이 답답하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이들이 나갈 길을 생각하면, 마치 안개라도 자욱하게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져서 미안하다. 이 안개를 걷어낼 시원한 바람은 언제쯤 불어올까. 사막에 한 두 방울 물이 모여 오아시스를 이루고 수많은 생명을 키워내듯 우리가 또 다시 꿈을 품을 방도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꿰매져야 한다. 우리는 왜 이리도 분열된 지경에 처하게 됐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헤아림의 결핍’이라는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치의 실종 시대에 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사람도 있고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누구도 나무만 본 적이 없고, 누구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고 말한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무리에 대해 가차 없이 공격을 해댄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편 무리에 서있는데 그 많은 이들을 무슨 권리로 무시할 수 있을까, 그들이 왜 반대를 하는지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일까. 타인에 대한 헤아림의 결핍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을 외면하는 일이 아닌가. 진심으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말이 상대를 몰아세우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상대를 몰아세우기에 급급하다. 누군가는 촛불을 들었고, 또 누군가는 태극기를 들었지만 국민을 앞세워 또 다른 국민을 모욕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정치인들이 너무 쉽게 쓴다. 반대 의견을 가진 다수의 국민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헤아림의 결핍이 극에 달한 모습이다. 상대를 무시하면서 자신만 옳다고 말하는 불통의 시대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갈등이 깊어질수록 이성은 마비되고 마침내 분노하거나 좌절하고 말 것이다. 말할 자유를 이런 식으로 누려서야 되겠는가? 소음에 가까운 말을 여기저기 퍼뜨리며 그러한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상황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알리는 데만 열중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며 따르는 사람들만 생각하고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모욕한다. 진영의 이분법과 선악의 이분법이 팽배해진 이 시대에 각자 자기 말만 늘어놓으면서 국민을 거론하는 이 무책임함과 오만함을 대체 어찌 해야 할까. 국민을 앞세우기 전에 지금의 분열된 상황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이성적으로 논리를 따져 무엇이 정의로운 일인지 모색하고 숙의하는 시간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꿈을 이루며 희망을 담보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헤아림의 미덕’이 필요하다. 반성도 없고 헤아림도 없는 현실 앞에서 청춘들에게 한없이 부끄럽지만, 우리의 청춘은 헤아림의 결핍에 빠지지 말고 인간이기에 끈을 놓으면 안 될 존엄성의 가치를 중시하기 바란다. 극복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이 있을 때 상대를 누르며 이기겠다는 전략 말고, 상대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며 토론을 끌어내고 문제의 본질과 자초지종을 논리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지성이기를 바란다. 헤아림의 미덕과 함께 빛나는 지성을 갖춘 우리 젊은이들이 미래의 상생 사회를 열어가기를 기도한다.
제 680 호 [상명만평] 이 별들은 우리 꺼다
황인선 (만화 3)
제 679 호 잊어서는 안 되는 이름
영화 <김복동>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확 불타올랐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사그라진다. 그리고 그 대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모든 사회적 이슈가 이렇듯,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 역시 막 대두하기 시작되었을 때에는 세계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싸움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점점 지쳤고 ‘위안부’라는 이 세 글자는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줄 로만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 있게 들여다본다면 전혀 해결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김복동’은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다. 수요시위에 관한 이야기, 대사관 시위에 관한 이야기, 평화나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소녀상과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한 이야기. 영화 ‘김복동’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김복동 할머니를 통해서 풀어낸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김복동 할머니의 일생의 일부를 담아내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뒤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 며 일본의 만행에 대해서 밝혔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노력과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노력, 같이 싸워주었던 시민 단체와 학생들의 노력 끝에 일본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일본이 취한 조치는 사죄가 아닌 ‘협정’이었다. 협정은 할머니들의 의지와 의견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할머니들은 협정 사실과 협정의 내용을 뉴스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부는 할머니들을 앞세워 배상금을 받아냈지만, 그 배상금을 아직도 할머니들에게 돌려주지 않고 있 다. 그리고 돈이 아닌 사과를 요구했던 할머니들에게 일본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1991년 첫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로 수년간 많은 사람이 싸워왔지만 아직도 일본의 사과는 못 받아낸 상황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올해 1월, 9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건강이 안 좋아 병실 에 누워계시던 할머니가 남긴 말씀은 ‘집에 가야 한다.’였다. 집에 가야 한다고 할 일이 아직 남았다고,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아직 남아있는 그 ‘할 일’은 누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일까. 방효주 기자
제 679 호 [책으로 세상 보기] 누군가의 몸이 눈사람이 되지 않길
작별 저자 한강 외 6명 출판사 은행나무 누군가의 몸이 눈사람이 되지 않길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왜 하필 주인공은 눈사람이 되었을까?’ 사실 소설의 제목이 ‘눈사람’이라고 착각될 만큼 소설 속 ‘눈사람’이란 단어는 수없이 나오고 그 성질과 상태에 대한 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눈사람의 묘사는 모두 주인공의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녹아내리기도 하고, 조그만 충격에도 쉽게 부서져 버리기도 했다. 주인공은 소설의 처음부터 싱글맘, 학교폭력, 노동자의 삶과 같이 힘겨운 현실 문제를 마주하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존재로 그려졌다. 따라서 매 순간 언제 놓아버릴지 모르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느끼고 어떤 사회적 또는 심리적인 요소에 의해 결국은 한없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한정적인 존재인 주인공의 모습을 눈사람을 통해 나타내고 싶던 것이 아닐까 한다. 소설을 한 번 읽은 후에는 눈사람이란 강렬한 소재에 갇혀 제목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결국 소설의 큰 내용은 ‘작별을 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아들에게, 사랑했던 연인에게,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고 통화를 하고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는 동안 소중했던 사람들과 떠나기 전 인사를 했다. ‘작별’의 사전적 의미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인데, 수동적인 뜻을 포함한 ‘이별’의 의미와는 달리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마치 주인공이 소멸되기 직전의 행동들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준비된 담담한 작별이란 것을 의미하는 듯 말이다. 눈사람이 결국엔 녹아 없어진다는 것은 주인공 또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병으로 인한 것인지 스스로 놓아버린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현실에 더 이상 미련 없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이 쓸쓸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사실 소설 속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찾아낸 의미들이 아닐 수도 있다. 왜 눈사람이 되었고 주인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그 의미 속에서 느끼는 우리 삶의 의문들, 순간의 공포심들일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 눈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는 어느 순간 눈사람이 되어도 놀라지 않고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인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소멸되기를 바라는, 어쩌면 스스로 눈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봐야 한다. 언젠가는 견딜 수 없는 사회의 현실과 부딪힐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송수연 기자
제 679 호 [기자석] “지성을 박탈당한 대학” 교수는 무지, 학생은 무감
연세대학교 류석춘 교수가 대학 강단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자발적 매춘부’로 폄훼하고 학생들이 성희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놀랍게도 이 발언은 사회학과 전공 수업인 ‘발전사회학’ 강좌에서 나왔다. 사회학 권위자 중 한 명이 역설적으로 사회학의 본질을 오도한 것이다. K대학교 모 학생이 조국 딸 부정입학 논란과 관련하여 교수들이 나눈 이야기를 증언했다. 교수들은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주제를 바꿨다. 그 후 꺼낸 이야기는 “지인의 아들이 K대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공 교수이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학생은 충격적이었다고 전했다. 자신은 “3년간 학생부 종합전형을 준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는데, 이렇게 쉽게 이른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다니...”라고 한탄했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회가 ‘지성인’으로 여기는 교수 역시 엘리트주의와 계급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학과, 강좌는 ‘발전사회학’임에도 교수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젠더문제에 대해 무지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또한 K 대학 교수들이 입시부정과 관련해 대학생들 앞에서 꺼낸 말들을 듣고 ‘경악’할 수밖에 없다. ‘일부’ 교수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부정은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며, 이어서 나온 이야기 역시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물론 그들은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학문에 정통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교수라는 계급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대학은 지성을 빼앗겼다. 계급성을 이해하고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는 지성인은 온 데 간 데 없고, 교수이자 권위자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약자를 조롱하고, 권력을 대물림하는 이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대학은 교수가 학문을 연구하고 학생과 의사소통하도록 강의와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게 ‘영업사원’으로 만들었다. 돈이 되는 정부와 기업의 프로젝트를 따와야만 교수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만든 것이다. 대학이 지성을 빼앗기자, 교수 역시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학생들도 여기서 벗어나기 힘들다. 학내에서 학생들은 ‘정치적인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한다. 파산당한 명지대 총학생회, 조국 사퇴 집회를 주동한 서울대와 고려대 총학생회 모두 ‘탈정치’를 외쳤다. 정치적인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오해하고 두려워한다. 청년들이 ‘박탈감’을 느낀다고 하지만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계급성과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학생들은 서로를 공감, 이해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한다. 사회로부터 목 죄인 탓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 청년이 멸종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또한 부정입학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발하면서 이원 캠퍼스나 평생교육원 학생들을 무시하는 학내 분위기는 결코 고학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사회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성찰 없이 학벌주의만을 고수하겠다는 태도는 앞서 언급한 교수의 모습과 닮아있다. 지성을 잃고 정치가 사라진 대학은 ‘대학’으로서 기능을 잃는다. 우리 사회 안에서 누구보다도 유식한 교수는 무지하고, 학생은 사색 없이 무감하다. 학계의 권위자여도,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이어도 그 사람의 지성을 판단할 때 사회적 위치와 경험, 공감능력과 연대의식을 배제할 수 없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으로서 기능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먼저 권위자와 엘리트의 차별의식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무지하고 무감한, 무용의 대학을 우리의 것으로 되찾는 길이다. 이해람 기자
제 679 호 [교수칼럼] 쓸데없고 시시한 이야기가 그리운 오늘
김은경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낭만적이라는 표현은 때로는 터무니없이 현실을 모르는 이에게 팔꿈치로 옆구리를 슬쩍 치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처럼 낭만이 그리운 때도 없다. 날마다 정치면 기사는 피로감을 더해주고 우리는 새로운 날의 새로운 소식을 기다려본다. 속절없이. 오늘 나의 메이트 포털은 ‘자디그 앤 볼테르(Zadig & Voltaire)’가 84% 세일을 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큰 폭의 세일이지만 여전히 그 숫자에서 한 자리를 빼도 선뜻 구매의욕이 일어나지 않는다. 금전적 부담이 아니라 취향 탓이라 해두자. 이 브랜드명을 알게 된 경위는 이렇다. 원래 프랑스의 한 장관이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디그 드 볼테르(Zadig de Voltaire)’라는 말 대신에 ‘자디그 에 볼테르(Zadig et Voltaire)’라 답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이야기를 들어서이다. 말인즉 ‘볼테르’라는 작가가 ‘자디그’를 써서 ‘볼테르의 자디그’라 해야 했는데 유명 브랜드명이 장관의 입에서 먼저 나와 버린 것이다. 철학서의 위엄과 함께 자신의 위상을 뽐내야 하는 그 시점에서 패션 브랜드명을 쏙 내뱉고 말았으니 입방아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이 이야기가 얼마나 고소한 안줏거리가 되었을까. 아, 그리고 말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어찌 놓치겠는가. 그 자리에서 폭소를 터트리는 대신 이 장면을 돌려보고 두고두고 숨 고르며 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권위자의 어이없는 실수는 바다의 물결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안겨준다. 기대가치를 뒤엎는 뜻밖의 전복은 낭만적 아이러니의 대표적 사례이다. 진지함이 과도할 때 바늘귀만한 무지의 구멍은 아이러니를 극대화하고 많은 이들에게 무장해제와 더불어 끄윽끄윽 웃음보따리를 선물한다. 고전 작품과 연관된 위정자의 재미난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다. 17세기에 출판된 『클레브 공작부인』은 당시로는 앞서간 심리소설이다. 2006년에 내무부 장관이었던 사르코지는 이렇게 오래된 연애소설이 국가고시 시험문제에 출제되는 게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언급을 했다. 심지어 출제자가 멍청하거나 사디스트 기질이 있어 그랬을 것이라는 둥, 노동자층에겐 수용불가라는 둥, 작품 폄하에 차별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후 사르코지가 2009년에 또 한 번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의 과거 발언이 환기되었고, 이에 대한 대중의 반발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즈음 그의 국가정책도 발언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랑스 국민이 너도나도 反사르코지의 아이콘이 된 이 책을 사서 읽는 바람에 한때 서점가에선 이 책의 품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책은 출간된 지 330여 년 만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정말 소소한 일에도 가히 혁명적인 사람들이다. 그쪽 나라도 정치인들의 부패와 비리에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가뭄에 비 내리듯 입가에 미소를 떠오르게 해주는 에피소드가 밝은 회색과 진한 회색 사이의 정치 채도 가운데 간간이 숨을 트이게 해준다. 싸움을 하되 싸움이 끝난 뒤 흙탕물이 튄 서로의 옷을 털어주는 매너의 장면을 언젠가는 보았으면 좋겠다. 너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보이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이상적 차원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파리의 노트르담』에선 흉물스럽고 일그러진 수성(獸性)에서 숭고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위고의 극작법이 잘 드러나 있다. 잘생긴 풰뷔스를 나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에스메랄다의 눈엔 콰지모도의 순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는 세상의 이치라 패스한다 치자. 그렇지만, 그래도 위고는 콰지모도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낭만주의의 이 극적인 갭은 감성을 자극하고 심금을 울리게 한다. 오늘 나는 이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것을 또렷이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를. “여보세요! 낭만은 픽션에서나 찾으세요!” 누가 곁에서 옆구리를 쿡 찌른다.
제 679 호 [사설] 대한민국과 정의사회
오래 전부터 인간은 공정성에 기초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갈망해왔다.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어떻게 해야 정의로운 국가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며 사회적 직분의 선발과정을 강조했다. 그는 국민을 세 부류로 공정하게 선발하여 각각의 임무를 부여했다. 그중 올바른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 국가운영을 책임지도록 선발된 최상위 엘리트계층에게는 사유재산은 물론이고 친자 양육권까지 박탈한다. 정치·사회의 지도자가 사리사욕에 얽매여 공정성을 훼손하면 정의사회의 실현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 이러한 구상은 인권 침해적 조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오랜 이론탐구와 실무를 거쳐 최종 선발된 위정자에게서도 이기심 극복은 어렵다는 플라톤의 고민이 엿보인다. 공정과 정의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플라톤 이후에도 지속되어 지금은 3권 분립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널리 확산되어 있다. 서양에 비해 민주적 정치이념을 다소 늦게 접한 대한민국도 지난 한 세기 동안 갖은 내우외환을 거치며 국민의 주권에 민감한 신흥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정치이념을 서로 달리하는 정당들은 각기 정책과 공약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정의사회란 다름 아닌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경쟁을 수반하는 선발의 공정성이 지켜지는 곳이다. 따라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는 새 정권의 선언적 약속에 사회정의를 갈망하던 국민의 가슴은 설레었을 것이다. 문제는 평등과 공정성 같은 이상적 가치가 정치구호의 차원을 넘어 어떻게 현실에 정착될 수 있는가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위정자들이 평등한 조건과 공정한 선발경쟁을 모범적으로 준수하고 국민이 이에 동참할 때 실현된다. 따라서 정치 지도층은 법적 기회평등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국민 다수가 경제·사회·문화적 위계와 차이에 의해 조건적 불평등에 처할 수 있음을 공감하고 염려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념적 주장 이전에 실천행위에 필요한 자기 비판적 공감·실천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 재력, 정보, 사회적 자본의 이기적 활용을 통해 공정성을 기만하는 파렴치 행위가 정치의 진영논리를 넘어 상식적 기준과 판단에서 배척될 수 있어야 한다. 공공적 신뢰에 민감해야 할 정치인과 사회 엘리트층이 당파 논리적 독선으로 평등과 공정성의 기본정신을 훼손한다면 정의사회는 그저 선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민생의 안정과 사회정의 회복을 내세우며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음에도 입법 권력은 여전히 정치적 다툼질에 그리고 사법 권력은 국민적 불신에 빠져있다. 국민의 행복과 정의사회를 표방하는 정치행위와 법치행정이 진영논리나 집단적 이해관심에 터한 정치 공학적 활동으로 축소되는 양상은 매우 걱정스럽다. 평등이나 공정성의 본질은 물론 실천과정의 도덕성 문제마저 외면한 채 사회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위정자들 스스로 기회평등과 공정한 선발에 대한 약속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해내야 한다. 양심에 근거해 행위하고 민초의 처지와 희망을 공감하는 정치인과 사법·행정 관료가 주류일 때 정의사회는 물론 국민의 정치의식도 성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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