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7 호 [상명만평] 물러설 수 없는 전투
만화학과 황인선
제 676 호 [상명만평] 6월은 호국 보훈의 달
황인선(만화 3)
제 676 호 [교수칼럼] 완벽한 교수, 그저 그런 교수
배희분 교수 (복지상담대학원 아동청소년상담학과) 아동과 청소년의 심리적, 행동적 문제를 다루는 상담실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부모의 말은 “선생님, 도대체 우리 애가 왜 저러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이유를 좀 알려주세요!”라는 간절한 호소일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상담이 수많은 고비를 넘어 드디어 “아하, 우리 아이가 아니라 제가 문제였군요. 제가 더 좋은 부모가 돼야겠네요!”라는 부모의 고해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자녀 문제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부족하던 부모가 문제에 있어 자신이 끼친 영향력을 알게 되고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 왜 ‘모든’ 경우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만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부모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자녀의 ‘문제’보다는 아이와 부모 간의 ‘관계’에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사람들이 상담실에 올 때 가지고 오는 호소문제들은 보다 근원적인 갈등이나 어려움이 현실과 일상에 표출되는 일종의 증상에 불과한 일이 많다. 여러 가지 상담이론들 중에 인간사에 있어 온갖 어려움이 모두 관계에서 오는 것이며, 관계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라고 보는 이론이 대상관계이론이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부모와의 초기 상호작용에서 경험한 것들이 자녀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자리 잡게 되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이후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즉 태어나서 맨처음 만나게 되는 양육자와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전 생애에 걸쳐 타인을 지각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본적인 구조가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대상관계이론의 중요한 이론가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위니컷(Donald Winnicott)은 생전에 엄마와 아이 약 6만여 쌍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아이를 망치고 힘들게 하는 엄마는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이상적이라 여기는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 즉 자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 안은 채 모든 필요를 앞서서 미리미리 채워주는 엄마라고 일갈했다. 위니컷에게 있어 좋은 엄마는 퍼펙트 마더가 아니라, 아이에게 사랑과 돌봄도 주지만 동시에 살다보면 으레 겪을 법한 적절한 좌절도 주는 엄마인 굿 이너프 마더(good enough mother),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저 그런 엄마’, ‘그냥 괜찮은 엄마’, 혹은 ‘그만하면 충분한 엄마’라고 결론 내렸다. 사실 완벽한 부모란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완벽해지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쏟다보면 정작 그러한 노력이 목적해야 할 자녀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진짜 좋은 엄마는 아이에게 적당한 좌절을 주어서 그 좌절을 통해 자녀가 자신만의 힘을 발견하고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가지게 해주는 엄마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않는 엄마, 그저 늘 그 자리에 있어주기만 해도 좋은 엄마, 아니 바쁠 땐 가끔 자리를 비우기도 하지만 곧 돌아올 거란 믿음을 주는 엄마다. 다시 이 글의 서두에서 가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문득 자녀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고 그 문제에 대한 이해도 통찰도 없었던 부모가 상담을 통해 부모로서 자신이 부족했음을 깊이 깨우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의 자녀 문제가 나아지지 않는 경우는 어떤 경우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더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자칫 굿 이너프 마더가 아니라 퍼펙트 마더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적 결심이 되는 경우일 것이다. 아이의 욕구를 다 채워준다는 미명하에 실은 부모 자신의 욕구를 자녀에게 투사하는 부모가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그들은 흔히 “도대체 뭐가 문제니?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잖아.”라고 말한다. 어려운 형편에 비싼 개인 과외며, 바이올린 교습이며, 발레수업을 시키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맨 것도, 심지어 고기 먹고 나면 반드시 밥도 한숟갈 먹어야 속이 편하다며 도리질하는 아이 입에 밥을 떠먹이곤 했던 것까지도 실은 자녀의 욕구와는 거리가 먼, 투사된 자신의 욕심이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위험은 비단 부모-자녀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자칫 퍼펙트 프로페서가 되고자 하는 욕구로 자신과 제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생각한다. 제자들의 사랑과 칭송을 한 몸에 받는 훌륭한 교수, 존경받는 교수가 되기 위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밀어붙이다 보면 자신의 욕구와 제자의 욕구를 혼동할 수도 있고, 가시적으로 보이는 업적과 성과를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대학교수는 높은 윤리적 잣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오히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좋은 관계의 기본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좋은 자질과 함께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까지도 수용하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교수에게도 필요하다. 강의평가는 우수하지만 논문쓰기가 어려운 사람도 있고, 연구 업적은 뛰어나지만 학생들과 소통이 유난히 힘든 사람도 있다. 자신의 굿(good)과 배드(bad)를 잘 통합하여 인식하는 교수가 학생들의 굿과 배드도 통합하여 볼 줄 알며, 이렇게 통합된 사제관계 속에서 비로소 교수는 학생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저 그런 교수, 그만하면 충분한 교수도 괜찮다.
제 676 호 [사설] 책을 보는 세상에서 책을 읽는 소중함을 잃지 않아야
독서는 ‘읽을 讀(독)’, ‘책 書(서)’, 글자 그대로 ‘책 읽기’를 의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자 ‘지혜의 원천’으로 알려져 왔고 그만큼 중요하고 필요한 행동 양식 으로 인식되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곧 미덕이다. 점토판과 파피루스 두루마리책을 책의 원형으로 본다면, 책이 존속한 시간은 최소 5000년이 넘으며, 미디어로써 대중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는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 발행을 기준으로 해도 600년에 가까운 시간을 가장 강력하고 친숙한 정보전달 미디어로 기능해 왔다. 인간은 삶을 위한 지식을 배우고 지혜를 얻기 위하여 책 읽기를 지속해 온 것이다. 책 이후에 등장한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이 음원 서비스, VOD 서비스, OTT 서비스 등으로 기능이 분산되는 경향을 보이는 현재까지도, 책은 비교적 변질되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물론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의 상용화, 디지털 정보의 생산, 유통, 보급이 활발해 지면서 ‘종이 없는 도서관’, ‘벽 없는 도서관’이 등장할 것이라는 (적어도 도서관계의 입장에서는) 우려스러운 논쟁거리로 격앙되었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 종이책도 도서관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매년 종이책의 출판량이 증가하고 있으며 도서관은 메이커스페이스와 같은 새로운 정보환경에 대비한 다양한 공간을 디자인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독서에 대한 몇몇 조사결과를 미루어 보면 종이책 독서 활동이 저조함을 알 수 있다. 2017년 발표된 좥국민독서실태조사좦 결과에 의하면 책 읽는 인구는 줄어들고 있으며, 성인은 일상 때문에 그리고 학생은 학업 때문에 독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책을 대체하거나 책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미디어의 활용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연간 종이책 독서량은 초등학생 67.1권, 중학생 18.5권, 고등학생 8.8권, 성인 8.3권으로 지난 2년 전 조사에 비하여 꽤 하락한 수치이다. 전자책 독서량 역시 활발한 편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여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다양해져서책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의존성이 적어진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정보를 추구하지 않거나 활용하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기존의 독서가 갖는 장점을 자칫 잃어버릴 위기를 맞이했다고 보기에는 충분한 데이터이다. 전자책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종이책의 위상에 또 한번 위기를 예고한다. 왜냐하면 전자책은 젊은 세대에 익숙한 정보기기를 활용하기 때문에 선호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책에서 파생된, 정보기술의 집약된 형태의 미디어인 이 전자책은 처음에는 종이책의 내용을 컴퓨터 모니터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형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표준화된 포맷을 이용하여 제작되어 유통 판매되고 있는 주요 미디어 중 하나이다. 같거나 유사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전자책과 종이책의 사용성을 비교한 연구가 다수 있다. 연구의 결과를 보면 종이책은 깊이 있는 내용 이해에 유리하고 전자책은 직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 전달에 유리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점을 두고 우리는 종이책은 ‘읽는다’라고 하고 전자책은 ‘본다’라고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전자책 읽기는 전통적인 독서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기관과 도서관에서도 여전히 전통적인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온북 읽기’, ‘한 도시 한 책 읽기’, ‘독서토론’, ‘글쓰기’ 와 같이 (종이)책으로 이용자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노력은 꾸준히 그리고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전자책과 같은 정보기기를 통한 정보 전달에 익숙한 세대를 위해서는 ‘문장을 샘플링하여 어울리는 이미지와 함께 SNS로 공유하기’, ‘SNS에 짧은 리뷰 공유하기’와 같은 방식으로 책의 의미를 전달하는 이벤트를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종이책을 읽기 어려운 세대에게는 반가운 방식이지만, 이미지로 책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가 지속되려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할 것이며, 독서가 활용되는 교육 프로그램이 대폭 늘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독서량이 성인이 되면서 8분의 1로 줄어든다는 것은 단지 시간이 없다는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의지가 생길수록 좋은 것을 수행함에 따르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하던 것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며, 일상에서 해야 하는 동기도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SNS에 리그램을 하며 감성에 빠지며 맥락을 놓친 한두 줄에 감동하는 것은 진정한 독서라고 보기 어렵다. 책을 보는 세상에 와 있지만, 책을 읽는 소중함을 잃지 않도록, 교육프로그램 안에서 독서가 중요한 수단이 되도록, 그리고 독서의 중요성에 대한 구체적 의미를 체득하도록 교육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제 676 호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교육부터 변화해야한다
미투 운동이 진행되면서 수면 밑에 감춰있던 부조리한 사건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를 통해서 우리 사회 속에서 은근히 용인되었던 차별적인 발언과 성추행들이 잘못됐다는 걸 확실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피해자는 더는 숨지 않고 용기를 내도된다는 것을 알려줬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는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차별적인 시선과 발언들이 남아있다. 또한 스쿨 미투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숨기기 급급해 묻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전히 교내에서는 차별적인 표현과 잣대가 학생들에게 행해지고 있다. 이는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교육은 오랫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학교 성교육의 내용은 교사 재량으로 가르치기에 교사의 역량에 따라 성교육의 질이 달라진다. 교사가 성에 대한 차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감독하고 제재할 제도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또한 형식적인 형태로 진행돼서 교사의 차별적인 시선은 그대로 성교육에서 드러난다. 또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주로 보건, 기술·가정 과목에서 성교육을 하는데 보건 과목은 학교의 재량으로 선택되는 선택과목이기에 보건 과목을 선택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성교육을 받지 못 한다. 또한 그 과목이 선택돼서 성교육을 하더라도 형식적인 부분이 많다. 그리고 기술·가정의 경우에도 성교육을 임신과 출산으로만 엮어 가르친다. 학교에서는 성교육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우리 교육의 변화가 필요하다. 성교육을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보건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하지 않거나, 따로 성교육 과목을 만들어야한다. 또한 기술가정에서는 성교육을 임신과 출산으로만 엮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제대로 성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학습목표를 세워야한다. 또한 성교육을 교사의 역량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고, 교육의 내용을 제도화시켜 학생들이 배워야할 것들을 꼭 배우고, 성교육에서 잘못된 인식을 배우는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배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한다. 다른 과목들도 중요하지만 성교육은 특히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몰라서 못 가르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성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 해 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지 못 하고 ‘성’을 놀림거리로 삼거나 무분별하게 사회에 만연한 차별적 시선들이 아이들에게 흡수되어 아이들도 차별을 내면화 하게 된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교육이 꼭 필요하다. 잘못된 생각을 흡수하더라도 교육을 통해 그것이 잘못됐다는 걸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교육에서는 그러지 못 하고 있다. 현재 학교에 있는 학생들은 스스로 변화를 이룩하고자 스쿨 미투를 통해 잘못된 발언 바로잡고, 학교를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 속에 학생들은 성교육의 변화를 간절하게 요구했다. 우리는 그 요구를 들어야 할 때이다. 학생들이 발 담고 있는 사회에 차별적인 시선과 행동이 만연하지만 이는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바른 시선을 갖도록 만들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는 성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사회로 나갈때 조금 더 좋은 세상으로의 변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제 675 호 [기자석] 연구·회계비리에 파산까지, 사학 변화해야
작년 10월 2일 취임한 유은혜 교육부 장관이 지난 5월 7일 “문재인 정부 3년 차를 맞아 사학혁신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며 교육부의 사립대학 감사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교육부는 교수가 미성년 자녀를 공저자로 등재하거나 해외 부실학회에 참석한 사안에 대해 15개 대학을 대상으로 특별감사를 실시하며 이번 6월 고등교육 혁신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지난 5월 7일 교육부가 발표한 고려중앙학원 및 고려대학교 회계부분감사를 통해 교직원 퇴직 선물비용과 유흥주점 및 단란주점 비용을 교비회계에서 지출한 것이 드러났다. 이에 고려대 학생들은 “대학 본부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 “등록금 돌려내라”며 항의했고 교육부의 ‘사학비리 근절’ 기조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교육부는 그 일환으로 교육부와 소속·산하기관, 사립대 등 감사에 전문가 단체 및 협회 등의 추천을 받은 사람과 일반 국민 중 공개모집을 통해 선발된 15명을 시민감사관으로 위촉하는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적 쇄신이 의미하는 바가 없진 않겠으나 교육부가 말하는 ‘사학 혁신’의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균등한 시민교육의 발전과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하는 것이 교육부의 역할이지만 “국민은 개돼지”라고 발언하며 그 기능을 교육부 고위공직자가 스스로 부정한 이후에도 교육부는 자기 몸에 흠집 내길 계속했다. ‘사학 비리’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슈가 아니었다. 1963년 사학법이 제정된 이후 끊임없이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현재진행중이다. 법인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사익만 추구한다는 지적은 일견 맞는 말이고 자체적인 개혁도 필요하지만 사학 사회 내의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은 행정부와 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부는 사과나무 아래 누워 사과가 떨어지길, 썩은 우물에 가만히 걸터앉아 알아서 맑아지길 기다리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 5월 22일 명지대학교 법인인 명지학원은 분양대금을 갚지 못해 채권자에 의해 파산 신청을 당해 재학생들은 학교의 존폐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교육부는 “파산 선고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법원에 전했지만 만약 법원이 파산 선고를 할 경우 명지학원과 법인이 운영하는 명지초·중·고와 명지대, 전문대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학원회계가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대학운영에 사용되는 교비회계는 법인과 별개이기 때문에 폐교될 가능성은 낮다. 이번 명지학원 파산 문제도 사학계의 구조적 문제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2007년 명지학원 이사장이 교비 727억여 원을 횡령하고 재단에 1,735억여 원의 손해를 끼쳐 2012년 횡령 및 배임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사학 비리 문제가 매년 쏟아짐에도 교육부는 적극적인 대책 및 감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번 고려대 교비 횡령에도 학교 당국은 대부분 주의·경고로 마무리했다. 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회계비리 재발방지 방안을 강구하고 내부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지만 교육부와 학생 모두 지켜볼 필요가 있다. 보도에 따르면 교육부가 감사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를 비롯한 사립대학 111곳이 종합감사를 받은 적 없다.명지학원 감사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이러한 부채 상황을 알았으나 ‘기관 경고’에 그쳤고, 법인에 해결책 마련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 신청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지난 24일 교육부 정책연구 보고서 ‘사립대학 개혁방안-부정·비리 근절 방안을 중심으로’가 서울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7월 기준 28개 대학에서 설립자의 손자·손녀가 3대 이상 이사장이나 총장 등을 맡고 있다. 이중 경성대, 고려대, 우송대는 4대째 대물림 중이며 전국 299개 사립대 학교법인 중 설립자, 임원, 총장 친인척이 교직원 등으로 근무하는 학교는 194개교(64.9%)이다. 이 보고서는 후손의 운영권 독점이 비리의 요인 중 하나이며, 친인척 비율 제한을 강화하는 등의 법개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고려대나 명지대 사태를 계기로 드러난 문제는 학교당 수천, 수만 명에 이르는 학생과 교직원의 이익을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시민감사관제도 도입, 종합감사 등 감사 강화로만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교육부의 지나친 사학 개입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교육부 역시 사학의 감사가 교육부가 주도하는 대학 구조조정과도 유리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사립대 공영형 전환도 사실상 무산되면서 유은혜 장관이 언급한 문 정권의 ‘사학 혁신’이 커다란 기조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유은혜 장관은 여러 차례 사학비리를 철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구조적 문제 해결정책을 내놓진 못했다. 따라서 정부는 학생과 교직원의 권리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국공립대와 ‘부패사학’을 혁신하면서 사학과 교육부의 균형을 지킬 수 있는 고등교육 혁신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제 675 호 [상명만평] 가정의 달은 마지막까지
황인선 (만화학과 3)
제 675 호 [교수칼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디지털
서지용 교수 (경영학부) 사람이 중심이 되는 디지털 금융최근 금융의 모습이 많이 바뀌고 있다.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인터넷 플랫폼에서의 거래횟수가 크게 늘고 있으며, 스마트폰만 있으면 손쉽게 금융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앞으로 뱅킹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지적이 과장되지 않은 듯하다. 혹자는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디지털 기기를 통한 금융거래가 늘고 있는 현 시대를 ‘디지털 금융 노마드(nomad)’의 시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금융거래 접근성과 편의성이 중시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금융업의 최대 화두는 디지털 기술의 고도화로 이동하고 있다. 디지털 금융서비스의 질적 수준이 IT기술수준에 달려있다는 판단에서다. 대부분 금융기관들이 블록체인,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력을 금융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제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다수 금융전문가들도 금융의 중심이 사람에서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금융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모멘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디지털 핵심기술은 금융의 영업방식에 큰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은 이미 은행의 고비용 송금방식을 변화시켰다. 스페인 최대은행인 산탄데르(Santander)는 블록체인 기반 국제송금 솔루션 업체인 리플(Ripple)을 통해 송금시간 단축과 비용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다. AI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시스템도 금융투자회사들의 사업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있다. 로봇(robot)과 투자전문가(advisor)의 합성어인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는 자산운용 서비스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로보어드바이저가 고소득층의 전유물이던 고액 자산운용 서비스 거래비용을 대폭 낮추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빅데이터 분석기술도 충분한 담보와 신용이력이 없는 사람들의 대출심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은 보험료 산정, 보험금 지급에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당 기술은 보험설계사의 고객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실시간 사고접수를 통해 보험금 지급 속도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금융이 결코 사람과 사람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금융플랫폼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비즈니스의 확장을 시도한다.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금융거래 확산이 대표적이다. 디지털 기술력이 금융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디지털 금융 비즈니스의 성공요인은 오히려 신뢰와 소통일 것이다. 금융플랫폼을 찾는 회원간의 신뢰와 소통을 바탕으로 투자관련 정보공유가 이루어지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사업 소재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소설 네트워크 회원의 정보와 신용을 활용하는 소셜 트레이딩, 소셜 크라우딩 보험, 소셜 네트워크 기반의 공동체 보증대출 등이 주목받고 있다. 해당 금융서비스가 거래비용을 낮추고, 투자수익률을 제고시킬 수 있는 혁신적 금융서비스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업은 전통적으로 휴먼 네트워크를 강조한다. 아날로그식 금융에서 디지털 금융으로의 변화가 금융업 본질인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훼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시되고 있다. 과거 금융거래가 금융기관과 고객간의 이차원적(two-dimensional) 소통에 머물렀다면, 디지털 금융에서는 플랫폼 회원과 회원간의 다차원적(multi-dimensional) 소통을 강조한다. 결국, 디지털 금융의 차별적 경쟁력은 인종, 종교, 성별, 세대별 특징과 차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 확보에 있다. 이미 시장을 선도하는 금융회사들은 대체로 플랫폼 사업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결론적으로 디지털 금융의 편의성이 디지털 기술 발전에서 나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신뢰와 소통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디지털 금융의 본질임도 엄연한 사실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금융거래의 접근방식, 시간, 장소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지만, 사람이 중심이 되는 금융업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제 675 호 [사설] 교육현장의 혁신이 필요한 때
2016년 세계 경제포럼에서 등장한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전반에 걸쳐 다양한 담론을 양산해 냈다. 제1차 산업혁명의 혁명적인 변화 후 기존의 산업에 테크놀로지가 결함된 4차 산업혁명의 담론은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이거나 디스토피아적인 전망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 와중에 4차 산업혁명 담론이 가장 첨예하게 대두한 곳이 학교 교육, 그중에서도 대학교육의 현장이다. 급속한 고령화와 학령인구의 감소, 급변하는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대응해 대학교육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를 모색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미래 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개편과 전공의 벽을 뛰어넘는 학사제도, IT기술과 전통학문의 융합, 학사구조의 개편 등을 통해 대학은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내적 요인이든 외적 요인이든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초연결, 초지능을 특징으로 하는 현재 기술의 발전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어 그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읽고 대응해야 하는지가 급선무인 상황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오늘날 대학교육 현장이 유연하게 변화를 수용하고, 교육의 내용이 변화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발명가이자 미래학자인 레이커즈 와일이 2005년에 내놓은 미래예측보고서라 할 책 「특이점이 온다」는 미래사회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예측한 과학기술이 현재 우리 곁에 와 있음을 보여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양자인간」 같은 과학소설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창조한 기술이 특이점의 시대에 오면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심지어는 유전공학, 나노공학, 로봇공학 덕분에 인간은 생물학적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기계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중심에 인공지능이 있고, 인간을 넘어선 강한 인공지능의 등장을 2045년으로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레이커즈 와일이 말한 강한 인공지능의 도래시점은 그의 예측 이후 근 20여년이 가까워오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2045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가까운 근 미래의 우리 앞에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우리의 대학교육현장은 교육내용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능력이 더 이상 기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 이상 고등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길러야 할 능력들은 과거에 배웠던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대학교육에서 낡은 강의노트로 대변되는 도제적인 지식의 전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 대신 급격한 기술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교육내용의 변화와 구성원들의 변화가 따라야할 것이다. 현재 대학교육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탐색능력, 문제해결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의력, 협업능력 윤리의식 강화 등의 교육일 것이다. 이견이 있지만 수많은 교육공학의 방법론들을 적용한 다양한 교육방법의 모색 역시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대학교육의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현재 대학교육의 현장이 과연 기술발전에 대응할 미래 사회인재를 양성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학문의 탐구보다는 급변하는 교육환경의 변화에 다양한 형태로 변화 할 것을 요구받는 교수자들의 피로감과 입시와 경쟁에 길들여진 학습자의 등장이 그 이유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입시경쟁에 노출된 학습자들의 무기력과 퇴행적인 사고능력은 놀랍게 높은 대학진학률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육의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게 한다. 최근의 학습자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협업능력을 요구하는 팀플, 토론이나 프로젝트 수업 등 문제해결능력 중심 수업을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 대신 교수자의 강의를 선호하며, 창의적인 사고보다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따르려는 온존적인 경향, 객관식 문제나 경쟁을 통한 상대평가가 공정하다는 인식 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급변하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초중고의 교육과정이 학습자중심, 과정중심교육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을 오늘날 대학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글을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실질문맹률이 OECD국가들 중 매우 높다는 사실은 퇴행적인 교육 현장의 실상을 말해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인간이 기계가 되고 기계가 인간이 되는 미래 변화의 시점인 특이점을 넘어선 시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포스트 휴먼의 시대가 눈앞에 와 있다. 그리고 교육의 현장에서는 대학의 구조와 교육의 변화에 대한 정책적인 요구와 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제도적인 변화와 함께 강한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기술발전을 대신할 수 있고, 미래사회의 창의적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을 위한 현장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제 674 호 [영화로 세상읽기] 너의 삶이 나의 삶으로
어벤져스:엔드게임(2019) 감독 : 안소니 루소 2019년 4월 24일에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2주가 지난 지금도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영화는 국내 개봉 1일째에 관객수 100만을 돌파하고 11일째에 누적 관객수 1000만을 돌파하며 국내 최단 기록을 갱신하였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지난 11년간의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이다. 이 영화 개봉에 앞서 루소 감독 형제는 관객들에게 트위터를 통해 편지를 보여주며 침묵을 요청하고 스포일러 금지령을 내렸다. 지난 6일 이후 스포금지령이 해제되었지만 본 영화평이 스포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하길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면 마블 히어로의 양대 산맥인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퇴장 방법이 서로 다르다. 영화 ‘아이언맨 1’에서 토니 스타크는 스타크 인더스트리라는 무기개발 회사의 사장으로 기업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무기가 테러리스트에게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약자를 도와주는 아이언맨으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기업가로서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초반에서는 자신의 가족을 먼저 살피는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어벤져스’에서 아이언맨은 세계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핵미사일을 갖고 우주로 날아가 세상을 구하였으며,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도 인피니티 스톤을 사용하여 모두를 구해냈다. 반면 캡틴 아메리카는 임무 수행 중 자신의 친구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였다. 마지막에는 미국 본토를 공격하려는 비행선에 탑승한 후, 자신을 희생하여 그 비행선을 북극에 추락시켜 세상을 구한다. 70년이 지난 이후 어벤져스의 일원으로 활동할 때에도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지키며 모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이 영화의 전투신을 살펴보면 캡틴 아메리카가 토르의 망치 묠니르를 들고 싸울 수 있을 만큼 ‘고귀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토르 1’ 시작에서 토르는 자신의 왕국인 아스가르드만을 위해 무분별하게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종족은 무참하게 살해하였고 결국 망치의 권능을 잠시 빼앗긴 적이 있다. 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고귀하지 않은 자’에게는 망치를 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캡틴 아메리카가 모두를 위하는 ‘고귀한 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본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캡틴 아메리카가 다 사용한 인피니티 스톤을 제자리에 두고 자신만의 삶을 살다가 현재로 돌아온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남을 위하는 삶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산 캡틴 아메리카는 현재에 와서 캡틴 아메리카의 자리를 2대에게 물려주고 영웅의 자리를 벗어난다. 두 영웅은 어벤져스의 두 리더였지만 각자 삶의 방식이 달랐으며 은퇴의 방식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을 아이언맨은 자신의 죽음에서 보여주었으며 아이언맨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캡틴 아메리카가 은퇴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캐릭터의 가치관 차이는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을 정도지만, 마지막에는 서로의 삶의 방식을 바꿀 만큼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마블의 영화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지난 11년간의 대 장정을 마무리한 그들의 퇴장은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을 넘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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