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4 호 [책으로 세상보기] 역사의 진보, (내) 인생의 진보
[책으로 세상보기] 역사의 진보, (내) 인생의 진보 역사란 무엇인가(1969) 지은이 : E.H.카 출판사 : 00 참 20대 청춘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사회는 고3 때까지 대학을 가야 한다며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내신 시험•수능만을 가르치고, 우리는 이를 배우고 공부하며 살아가다가 성인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명확한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인생’이라는 영역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그뿐만 아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로봇, 무인기계 등의 신기술과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 기술은 ‘편리함‘을 가져옴과 동시에 ‘불안’을 야기한다. 이로써 ‘취업난’은 점점 심각해져 무한 경쟁과 취업 스트레스로 인한 압박감,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대다수의 20대를 힘들게 한다. 이러한 세상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 역시 마찬가지로 힘들어한다. ‘잘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고민들 속에서 나의 일상은 흘러간다. 그런데,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런 나에게 “비관과 절망에 빠지지 말고,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 ’진보로서의 희망‘을 품고 나아가라“고 이야기했다. ‘카’는 1차,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 원자폭탄 투하, 냉전 시기를 겪고도 ‘진보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당시 대다수의 서구의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비관주의, 절망, 회의주의 속에서도 ‘카’는 진보의 믿음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카’는 우리 인류의 역사는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퇴보하더라도, 길게 보면 전진하고 나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사회적 획득 과정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고 본 것이다. 맞는 이야기이다. 인류의 역사를 길게 조망하면 우리 인류는 발전하고, 나아졌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과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먼 거리를 편리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왕과 귀족’이 중심이 아닌 ‘시민‘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으며,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100년 전, 200년 전, 조선시대와 비교해보더라도 사회, 정치, 문화, 경제, 기술, 인간의 의식 수준 등 모든 면에서 발전을 이룬 것임을, 더 나은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역사에 절망스럽고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간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발전하고, 발달한 사회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내 인생이라는 역사’에 있어서도 ‘진보로서의 희망 - 더 나아갈 수 있고,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려 더 노력하기로 했다. 우리 인류의 역사가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에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갔듯이, 나도 ’내 인생이라는 개인의 역사’가 당장 힘들고, 불안해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가야겠다. 쉽지 않겠지만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고, 비관하고 절망하면 내 인생의 역사는 더 퇴보할 뿐이다. 나는 어느 순간 많이 지치고 힘들다는 이유로 점점 ‘고정형 마인드셋’으로 살아간 것 같다. 힘든 순간에 좌절과 포기를 하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내 인생의 역사’를 퇴보시킬 뿐인데 말이다. ‘카’의 진보로서의 역사에 대한 믿음은, 내 인생이라는 역사에 대한 ’성장형 마인드셋‘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나는 앞으로 다시 힘을 내어 ’성장형 마인드셋‘을 장착하고 살아갈 것이다. 지금 순간적으로 힘들거나, 뒤처지는 것 같아도, ’언젠간 나아가리라는 믿음,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품고서 말이다. 나는 성장하고 있고, 변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갈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박영수 (경영학부 • 4)
제 674 호 [기자석] 나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나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나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외적으로 어려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어려지고 있다. 엄마는 내게 “너는 무슨 나이를 거꾸로 먹냐”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주관적으로 나를 보았을 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낀다. 어렸을 때 또래 아이들이 온갖 장신구에, 귀여운 헤어스타일에,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으려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런 것들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이 공주 인형을 가지고 놀 때, 나는 오히려 티비를 보며 춤을 추고 예능을 봤다. 엄마가 머리에 망을 씌우려고 하니 화를 내고서 결국은 양갈래로 묶기만 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귀여운 인형을 보면 마구 사고 싶고, 캐릭터 상품들을 보면 그대로 앞에 멈춰서버린다. 단순히 내가 어린이들처럼 장난감이 너무 귀여워보이고 갖고싶어서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내면의 내가 너무 지쳐있어서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것 같다. 나는 요즘 갈수록 모든 일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내면이 어려지고 있는 건 정말 확실한 것 같다. 흔히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른이’라고 부른다. 물론 아직 21세에 불과하지만, 맞다. 나는 내면이 ‘어른이’다. 하지만 결코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거의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또한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근무 시간을 보장해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야간근무나 주말근무를 시키는 곳은 많고, 이로 인한 국민들의 스트레스 지수도 높은 편이다. 요즘 시대에 평범한 시민인 우리는 ‘휴식’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아닌 그런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휴식시간에도 남은 업무가 있거나, 아직 해야 할 업무가 많다면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늘어지기 마련이다. 즉,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내면에 이런 부분들이 조금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피로나 스트레스가 더 심해진다면 우울증이 올 수도 있고 무기력증, 혹은 그 외의 다른 증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이는 내면뿐만 아니라 외적 부분인 우리 몸에도 피해를 준다. 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이다. 나도 그랬다. 각박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나도 물론 ‘어른의 시간’을 짧게 경험했지만, 많이 방황했다. 늘 내가 아는 반경 내에서만 생활을 하던 중고등학생 때와는 달리, 대학생이 되어서는 내가 온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던져져야만 했다. 중고등학생 때는 매일같이 봐도 친구들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대학생은 그것보다도 더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 인간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다. 4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하나 이상의 전공과목을 깨우쳐야만 했다. 그마저도 어느 도움도 없이, 학창 시절에는 흔하디 흔하던 그 방과후 수업도 하나도 없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꽤 자주 힘들어했던 것 같다. 세상은 이런 현상을 ‘현타(현실자각 타임)’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그 현타가 유난히도 크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시간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내가 내면을 ‘어른이’의 모습으로 살아가게끔 자극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언니들은 나보다 4~5살 정도 많은데, 한 캐릭터나 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분야에 빠져서 산다. 쉬는 날이면 새로 나온 제품들을 구경하러 나가고, 매번 제품을 구매해 돌아온다. 언니들의 가방에는 늘 그런 물건들이 넘쳐난다. 나는 그런 언니들을 보며 작년까지만 해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어린 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반대 입장도 되어보아야 한다. 늘 주변에서 그런 제품들을 사고 쓰면서 좋아하던 언니들의 모습을 자주 보던 것이 나도 모르게 생각났고, 그걸 보고 자란 나도 어느 순간 그런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선 느꼈다. 내 안에서 엄청나게 행복한 감정들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니 나처럼 이렇게 ‘어른이’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의 내면이 ‘어른이’가 된 순간부터, 나는 내면이 행복한 ‘어른’이 된 것이다. 힘들던 순간들을 극복한 나처럼, 많은 어른들이 스스로 내면에 행복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김수인 기자
제 674 호 [편집장의 시선]무지에 대한 무관심
“저는 불의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해가 되어 나에게 다가오더라도 저는 이 세상을 결코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막심고리끼 「어머니」 중 러시아의 문호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에서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인 파벨 블라소프가 그의 어머니 펠라게바 닐로프냐에게 한 말이다. 파벨 블라소프는 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주정뱅이였고 펠라게바 닐로프냐는 글씨도 읽지 못하는, 권력의 변두리에 위치한 여성 노동자였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무지에 맞섰고 마침내 혁명가로 거듭나게 된다. 나는 항상 나의 무지를 두려워한다. 사람으로서의 내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기자로서 펜을 쥔 내가 누군가를 인격 살인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힐 의도가 전혀 없었던 말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살점 깊은 곳까지 도려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짊어지고 있다. 동시에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사회에 대해 무지했을 때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특정 중요 사안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대우받든, 기계적 부속품으로 인지되든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앎’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은 스스로 죽음에 다가서는 것이자 사회 기득권이 자신의 권력을 마음껏 축적할 수 있게 해주며, 비로소 공동체를 병들게 만든다.그런가하면 자신의 무지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몰라서 그랬다”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핑계는 없다. 우리 대학 안에서 유의미한 담론이 형성되고 있지 않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학내 사안, 정치사회적 이슈 등에 대한 무지와, 이 무지에 대한 무관심이 오히려 여론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에 심각한 병폐로 학생사회에 악순환의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무관심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총학생회 역시 제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며, 그 의지 또한 찾아보기 쉽지 않다. 총학생회가 캠퍼스의 중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진보를 위한 목소리가 없기 때문에 학교도 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캠퍼스의 경사만큼이나 기울어진 대학 사회로 인해 발생하는 학생 자치의 붕괴가 발생하고 있다. 학교와 학생 사이의 정보 격차 등으로 생기는 학생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가만히 앉아 시혜만을 기다려선 안 된다. 무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은 스스로를 절벽에 몰아넣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무지에 대한 무관심은 대다수의 학생들에서 학생자치로 이어지며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요한 의제 또한 확장성은 물론 진중함까지 떨어지는 온라인상에서 기껏해야 하루 이틀 이어지는 실정이며, 학생총회 등 공개적인 토론장에서 함께 연대하여 고민하고자 하는 욕심은 보이지 않는다. 학내에서 어떠한 의제도 전해질을 따라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학내언론이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없어진다. 모든 사람이 지식에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학생에게 주어진 분명한 사명은 무지에 맞서는 것이다. 파벨 블라소프와 펠라게바 닐로프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질문하는 자세, 그리고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다.무지에 맞서자. 그것이 배움이고, 그래야만 학생이다. 그리고 그 저항이 행해지는 장소가 대학이다.
제 674 호 [교수칼럼] 박물관과 함께하는 유학생 문화 나눔<단오맞이 전통체험>
하희정 교수 (의류학전공) 벚꽃이 한창이더니 어느덧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5월이다. 라일락 향기를 맡으면 곧 모내기 시기가 오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초여름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5월 단오도 생각이 난다. 설, 추석, 한식과 함께 4대 명절에 속하는 단오는 음력으로 5월 5일이다. 단옷날 우리는 풍요와 건강, 안녕을 기원하며 세시풍속을 즐기면서 수리떡을 먹는다. 중국에서는 쫑쯔를 먹고 용선 경기를 하면서 굴원을 추모한다. 일본은 중국과 같이 쫑쯔를 먹고 우리나라처럼 창포를 사용하지만 음력이 아니고 양력 5월 5일이 단오이다. 단오의 또 다른 이름은 천중절, 수릿날로서 신성한 날, 최고의 날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단오와 관련하여 여러 지역에서는 다양한 의례와 행사가 행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례 깊고 유명한 단오 축제로는 강릉단오제를 들 수 있다. 민족 전통 민속 축제의 원형성을 간직하고 있는 강릉단오제는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13호로 등록되었고,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난 5월 9일에는 ‘지나온 천년·이어갈 천년’을 주제로 2019년 강릉단오제 시작을 알리는 신주미봉정 및 빚기 행사가 열렸다. 신주미는 집안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기 위해 신에게 바칠 술을 담그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행사가 진행되는 6월 3일부터 6월 10일까지 씨름, 그네, 투호, 줄다리기, 윷놀이 등의 민속놀이 행사가 이어지며, 단오신주·수리취떡 맛보기, 창포 머리감기, 단오부채그리기 등의 다양한 전통 체험이 이루어진다. 단오는 고대의 제천의례가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오에 행해지는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씨름, 그네뛰기, 활쏘기 등이 있으며, 녹색과 홍색의 단오빔을 입고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물로 감은 머리에 창포 뿌리로 만든 창포잠을 꽂는 치장을 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 좥단오풍정좦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갈 것 같다. 창포잠 양쪽에 붉은 색의 연지를 바르거나 수·복자를 썼는데, 이렇게 하면 악귀를 쫓아 액운을 막고 건강과 복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갓 채취한 취에 쌀가루를 버무려 만든 수리떡을 올려놓고 단오고사를 지낸다. 수리떡은 단오를 맞아 만들어 먹는 절식으로 건강을 기원하고 더위와 액운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수리취가 주재료라 쌉싸름한 맛을 낸다. 취 종류 중에 참취와 곰취는 나물로 주로 사용되고, 수리취는 색과 향이 좋아 나물보다는 떡을 만드는데 주로 이용되어 떡취라고도 부른다. 수리취떡으로 인지도가 높은 곳은 강릉단오제가 열리는 강원도로 취의 특성상 산지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라 이곳에서 많이 채취되는데, 강릉단오제 생활권인 정선이 수리떡으로 특히 유명하다. 더위를 잘 이겨내라는 의미에서 선물로 주고받는 단오부채인 단오선도 있다. 공영에서 대나무 생산지인 전주·남원 등에 부채 도안과 부채 제작 방법 등을 일러주고 부채를 만들어 진상하도록 하였는데, 이 부채를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고, 신하들은 자신의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생겨난 풍속이라고 한다. 부채는 크게 원선과 접선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원선은 부채살에 비단이나 전통 한지 등을 붙여서 만든 둥근형의 부채이고 접선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부채를 가리킨다. 우리대학 박물관에서도 2019 박물관과 함께하는 유학생 문화 나눔 행사로 5월 29일 학술정보관과 밀레니엄관 사이에서 〈단오맞이 전통체험〉 행사를 실시한다. 재학생들과 외국인 유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단오부채 만들기, 수리떡 맛보기 등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경험 할 수 있는 〈단오맞이 전통체험〉을 통해 올 여름도 건강하고 무탈하게, 시원한 여름나기가 되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대나무를 쪼갠 살들 위에 닥나무를 원료로 한 전통 한지로 감싸 만든 단오부채를 부치고 있노라면 어느새 더위는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도 날아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제 674 호 [사설] 갈등의 시대를 넘어서려면
현재 우리 사회는 많은 영역에서 극단적 갈등의 상황이 존재하거나 증폭되어 가고 있다. 보수와 진보, 우와 좌로 나누어진 이념의 갈등, 구세대와 신세대로 구분되는 세대 간 갈등, 남성과 여성 간의 젠더 갈등 등 실로 갈등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종류와 내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갈등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하여 왔고 지속적인 논쟁의 이슈가 되어 왔다. 하지만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보면 단순히 논쟁의 차원을 벗어나 극단적인 표현과 개인적인 인신공격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누르고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야 말겠다는 결연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무릇 사회는 현재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에 의해 발전하고 균형을 이루어 왔다. 당면한 현실에 만족하고 그 상황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다면 현상의 유지는 고사하고 퇴보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사회변화를 위한 담론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발전을 위한 토론과 논쟁은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정당한 방법과 절차에 따를 때에만 그 결과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정당성은 차치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이 속한 진영을 대변하거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내세우며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제압하는 것이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생각과 이념은 각각 타당하고 명확한 근거가 있으며, 각 주장에는 합리적인 기반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만일 절대 무오한 이념과 사상이 존재했다면, 이 세상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을 것이며, 다양한 학문과 사회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현대의 우리는 하나의 틀 속에서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생활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생활이 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세상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다양한 이념과 문화 간의 갈등이나 충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다양한 문화가 갖고 있는 특성을 인정하고 각각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공생해 나가는 방법, 두 번째는 소수의 집단에서 지배적인 집단의 문화를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방법, 세 번째는 기존의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통합한 새로운 제3의 문화 내지는 이념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지배적인 이념이나 문화 집단이 자신과는 다른 다양한 소수의 의견이나 사상을 지배하거나 말살해 버리는 방법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그르며,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이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마지막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네 가지의 방안 중에서 가장 강제력이 크고, 통합의 가능성이나 수용도가 낮은 방안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자신의 가치를 강제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형성하고, 때로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문화 간 갈등을 조장하거나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된다. 근대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많은 이념적 갈등이 있었고, 때로는 하나의 이념이 다른 이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자신과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였으며, 나아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핍박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를 경험했던 이른바 기성세대들이 사회의 주축이 된 지금, 우리는 과연 지난 시절 그토록 염원하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현재 상황만을 두고 평가해 본다면 그 답은 ‘아니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하나의 사상과 이념을 강요받았던 세력이 또 다른 사상과 이념을 강요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또 다른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 역사와 한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세상을 지배했던 이념과 가치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절대로 하나의 방향으로만 발전하지는 않았으며, 심지어 한 시대에서의 선이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는 없어져야 할 악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다양한 이념과 가치를 위한 건전한 논의와 토론이 보장된 사회에서 더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념의 갈등이나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젠더 간의 갈등 등은 이전에도 존재했고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수 있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극단적인 대립과 반목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이용되고 점점 증폭되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는 자신과 다른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인정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비판과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 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제 672 호 [기자석] 당신의 불편함도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부천에 사는 나는 매일 학교를 가기 위해 남영역을 이용한다. 남영역은 국민대와 상명대를 다니는 친구나 직장인들이 학교나 직장을 가기 위해서 늘 붐비는 곳이다. 사람들은 버스를 탈 때에 자리를 앉기 위해서 새치기를 하거나 뒷문 승차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부딪혀 다치거나 서로 기분이 나쁜 경험이 빈번했다. 나 그리고 함께 등교하는 친구 또한 새치기하는 사람을 보면 등굣길부터 기분이 나빴다. 행복해야 할 등굣길인데 시작부터 기분 나쁘게 등교하지 않고 좋게 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평소 다른 정류장을 이용할 때에는 버스마다 줄 서는 라인이 있어서 줄 대로 들어가며, 새치기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이 문제에 대안으로 적용하여 줄 라인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안을 실행하는 것은 막연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페인트를 사서 직접 그릴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땅이 누구 소유의 땅인지 몰라서 허락을 받지 않고 그리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시작은 어려웠지만 함께 고민해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그렇게 함께 고민하던 중 남영역은 용산구에 있는 땅이니 일단 용산구의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생각을 했다. 어떻게 연락이 닿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용산구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는 것과 용산구청장님 sns 문자로 이야기를 남기는 것을 생각했다. 후자의 방법은 사실 구청장님이 안 보실 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장문의 글을 남겼다.그런데 문자를 보내고 하루가 지난 후 바로 구청장님께 답장이 왔다. 용산구에서 직접 줄을 그려줄 테니 와서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셨다.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바로 찾아뵐 시간을 잡았다. 용산구청에 가서 용산구청장님과 대화를 나누고 담당자분과 함께 준비한 ppt로 남영역의 문제점 그리고 해결방안을 말씀드렸다. 우리의 의견을 들어주시고 변화까지 약속해주셨을 때 정말 꿈만 같았다. 그리고 한 달 후 남영역에 줄이 생겼다.처음 생겼을 때는 남영역 이용하시는 분들에게 줄이 익숙하지 않은지 줄을 서는 사람보다 그냥 막 서있는 사람이 더 많아서 “어떻게 줄을 알리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남영역의 줄을 보신 학우분께서 학교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서 ‘줄이 생겼으니 줄을 지켜달라’라는 글을 올리면서 많은 학우들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한두 명이 줄을 서다 보니 다른 분들도 서기 시작했다. 아침에 통학을 할 때 줄을 지켜주는 학우들을 보면 기뻤고, 새치기 없이 시작하는 통학이 행복했다. 이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짧은 기간이었다. 그냥 내가 불편해서 시작했고, 고맙게도 그런 문제점을 함께 공유하던 친구들이 있어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잘 지켜주는 학우들 덕분에 우리들의 노력이 의미있게 되었다. 이 일을 진행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누구나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불만을 갖는다. “여기는 왜 이리 깜깜할까?”, “이 시설은 이렇게 변화하면 사람들이 더 편안할 텐데” 등이 있다. 변화는 우리가 느끼는 불만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느꼈다. 소소한 나의 불편함에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변화로 나아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자신의 불편함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용기를 드리고 싶었다. 과거의 나도 작은 불평, 불만으로만 끝냈다면 이러한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의 불평을 당신의 손으로 바꿔보길 바란다.
제 672 호 [편집장의 시선] 자치는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2018년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방분권’으로 시끄러웠다.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중앙정부의 정치적, 재정적 구속력을 문제 삼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올 겨울 지역신문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인턴기자를 하며 마주한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의 모습은 그들이 과연 ‘자치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 들게 했다. 지역민들이 구청 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자 지자체는 풍물패를 동원하여 방해했다. 그 후 주민간담회에서 구청장의 “당신들이 나를 뽑았다. 4년 후에 알아서 하라”는 말은 취재기자들의 얼굴에 실소를 띠게 만들었다. 구의회 본 회의에서는 거수투표를 진행할 때 찬성과 반대에 동시에 투표한 의원이 있었다. 그리고는 같은 당원끼리 “어디에 거수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지자체의 불통과 무능은 ‘지방분권’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만 남게 만들었다. 자치도 ‘자격’을 갖춘 이들이 맡아야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학생자치도 마찬가지이다. ‘먹고사니즘’에 지친 학생들이 자치에 무관심해졌다는 것은 핑계이며, 자치를 책임진 사람들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다. 학생자치를 이끄는 이들이 과연 ‘자치의 자격’을 가졌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19학년도 1학기가 시작되고 학생자치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학생복지팀과의 간담회가 열려 학생자치기구와 학교의 소통이 시작되었고, 대의원회에서 학생회비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며 학생자치기구별 회칙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학생자치의 길은 멀고도 험한 듯 하다. 학교에서의 질문은 말라버렸다. 몇몇 학생자치기구의 간담회, 수많은 대의원이 참여한 총회에서 질문은 ‘가뭄 상태’와 다름없었다. 정말 학교는 아무런 문제없이 완벽할까. 질문 없이 침묵을 고수하는 조직은 성장할 수 없다.간담회 준비가 미흡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었다. 몇몇 학생자치기구는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 제시했을 공약들에 대한 사전지식과 정보가 매우 부족했다. 근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의미가 없다. 간담회 역시 학생복지팀의 “안 된다” 혹은 “구체적인 자료와 방안을 준비해오라”는 말에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한 채 흘러갔다. 4월에 있을 총장 간담회까지 이렇게 진행된다면 학생생활이 과연 변화는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편 학생과 학교가 소통할 수 있는 자리의 협상 테이블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정보와 권력의 불균형은 학생자치가 온전한 형태를 띠지 못하게 만든다. 학생자치기구에서 학생들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려면 학교의 검토가 필요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학교를 설득해야만 한다. 이들이 ‘자치의 자격’을 갖추려면 자체적인 역량강화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모든 자치기구가 구성원들의 관심과 지지를 기반으로 하듯, 학생자치기구에게 학생들의 관심과 지지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지역은 집행부와 의회의 자치에서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주민자치’로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학교도 자치기구와 학교만의 탁상공론에서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생자치’로 변모해야한다. 이해람 기자
제 672 호 [교수칼럼]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오성호 교수 (공공인재학부) 인간은 항상 꿈을 꾼다. 무한한 희망과 행복을 주는 길몽, 몸서리치게 겁이 나는 악몽..... 꿈 하나. 먹고 살 것이 없었던 1960년대 어느 해 1월1일에 한 만화가가 어린이들이 보는 잡지에 21세기의 희망을 그린 만화를 그렸다. 잡지를 펼친 어린이 눈에 그려진 미래세계는 그야말로 풍요와 즐거움의 세계다. 사람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해야 할 생산활동은 기계가 다 해준다.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자원, 심지어 에너지도 과학의 힘에 의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 사람은 편히 삶을 즐기면 된다. 그 옆에는 충실한 로봇이 주인의 지시에 따라 모든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어린이 눈에 가장 남는 장면은 제주도 목장으로부터 우유가 수도관을 통해 모든 가정에 공급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유로 목욕도 할 수 있다. 얼마나 마음을 넉넉하고 행복하게 해주던지.... 또 하나의 꿈. 1995년 4억6천만달러를 벌어들인 영화 ‘매트릭스’가 세상에 나왔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살면서 꿈을 꾼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인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현실인지... 주인공이 살고 있는 2199년의 실제는 인공지능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기계는 스스로 결정하고, 만들고, 움직인다. 강제로 부숴지지 않으면 영원히 산다. 그 시대의 인간은 기계가 작동하는데 필요한 생체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다. 기계(인공지능)는 인간으로 하여금 200년 전에나 있었던 먹고 마시고 일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꿈) 속에서 지내게 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선택한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 인간은 소멸한다. 그러한 암울한 현실을 깨달은 소수의 인간이 기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저항운동을 벌이지만, 늘 쫓기고, 고달프고, 공포에 질려있다. 1960년대에 유토피아적인 21세기를 그린 만화는 지금 찾기가 어렵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유토피아는 아니라도 매우 낙관적인 미래를 그린 이정문화백의 만화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놀랍게도 그 만화에서 예측한 미래는 ‘달나라로 수학여행을 가는’ 한 가지만 빼고는 다 이루어졌다. 전화기라기보다 컴퓨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한 핸드폰, 화상통화, 원격진료, 전기자동차, 움직이는 도로 등등... 2199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몇 미래학자가 특이점이 온다고 외치고 있다. 특이점은 기계의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는 시점이다. 이들은 비관적이지는 않지만, 경험하지 못한 신세계에 대한 불안을 감추지도 않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생활하는데 필수적 조건인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초기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요즘은 그에 못지않게 직업의 내용이 달라지는데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을까 혹은 심지어 사람들이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한 강연의 말미에 미래는 인류가 ‘신들과 쓸모없는 사람들’의 두 부류로 구분될 거라는 간단한 전망을 하기도 했다. 신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기계가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해주는 능력을 가진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창출되는 부도 독점한다. 반면에 쓸모없는 사람들은 생산에 기여할 능력이 없는 대부분의 잉여 인간들이다. 그래서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보는 미래학자들은,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서 인류 전체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꿈이 아닌 이야기 하나. 2019년 3월 말미에 따뜻한 봄볕과 미세먼지 사이를 거니는 많은 젊은 인간들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있을까? 그들은 ‘자기’와 ‘자기들’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그리고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나이 많은 인간 하나.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한가로이 남은 시간을 보내나? 아니면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까? 아비로부터는 그럴듯한 세상을 넘겨 받았는데....
제 672 호 [사설]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의 조화가 필요한 때
스포츠(Sports)의 개념은 운동의 행위에 경쟁성, 흥미성, 규칙성을 가미한 개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본능인 공격성을 감소시키고, 건전한 사회성을 함양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스포츠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관심의 폭이 폭발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스포츠는 크게 ‘SEE’의 스포츠인 엘리트 스포츠와 ‘DO’의 스포츠인 생활체육 활동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 행위로 나뉠 수 있는데. 엘리트 스포츠는 국가대표급 경기, 프로스포츠 경기를 포함한 관람 스포츠를 말하며 스포츠행위는 생활체육프로그램 참여와 운동(신체의 조작적 움직임) 행위를 포괄한다. 대한민국의 엘리트스포츠 정책은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진화해왔다. 과거 엘리트스포츠 정책은 한국전쟁 이후 국민통합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의 우외 확보를 이룩하기 위한 수단적 측면이 강하였으나 최근의 정책은 궁극적 국민복지실현, 국민 건강 증진, 여가 활동의 방법적 차원, 프로스포츠 활성화를 통한 국가 경제력 강화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인기 구기 종목들의 프로화로 인해 스포츠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 인식 증대와 시너지 효과 창출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과거 ‘SEE’위주의 스포츠 정책으로 인해 ‘DO’의 스포츠인 자신의 건강과 행복감을 향유할 수 있는 생활 스포츠 분야의 성장은 조금은 더딘 부분이 있다. 이러한 부분의 보완을 위해 최근 정부는 민주적 거버넌스에 기반한 스포츠를 통해 궁극적 복지향상에 대한 방안을 ‘스포츠비전 2030’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대한민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단의 기량이 과거 보다 많이 향상되어 축구경기를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국민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행하는 것도 아닌데 왜 모든 국민들은 우리 국가대표팀의 선전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엘리트 스포츠만이 제공 할 수 있는 강력한 카타르시스의 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 간 스포츠 경기의 경우 역사, 문화적 환경과 결부되어 경쟁심과 즐거움이 배가된다. 필자가 대학 신입생이었던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되었던 ‘FIFA 19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한국은 수십년 만에 일본에게 패했다. 본선진출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는 듯 했으나 일본 국가대표팀이 최종전에서 종료 10초전 이라크팀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최종전에서 북한에 승리한 대한민국은 천신만고끝에 본선진출권을 거머쥐었다. 대한민국은 최종전에서 북한에 3:0으로 승리하고도 매우 침체되어 있었으나 타 경기장에서 진행된 일본과 이라크의 동점 경기 결과를 접하고 온 국민이 환호하였다. 이것이 바로 ‘도하의 기적’이다. 반대로 일본 입장에서 보면 ‘도하의 비극’ 이 되는 것이다. 이후 아이러니 하게도 그 동점골을 성공시켰던 이라크의 ‘자심’선수는 현 서울FC의 전신인 유공 축구단에 스카웃이 되었다. 이렇듯 스포츠 경기는 국가의 위상, 애국심과도 결부되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근래 미국 메이저리그 로스엔젤레스 다저스팀의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 선수는 약간의 부상이 있긴 했으나 쾌투를 이어나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자체 프로리그인 ‘KBO’를 운영하고 있어 야구를 좋아하는 팬층이 다수 확보되어 있고 선수들의 기량 또한 매우 높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저변위에 야구팬들은 류현진 선수의 활약을 보면서 직접적으로 MLB리그의 수준을 경험하게 되고 이러한 경험은 대한민국 야구 기술 수준 향상, 관중증가, 시장 창출을 통한 국가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게 된다. 요즘 대학생들은 학업, 취업 고민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 수업, 과목별 과제학습, 취업을 위한 역량개발 등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적 차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러한 부분을 완벽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적 차원이 바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스포츠는 스트레스를 긍정적으로 순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관람 스포츠를 즐기면서 자기가 선호하는 팀과 선수를 응원하고 또한 몰입하는 것 그리고 스포츠 동아리 참여를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신체적 강건함을 유지하며, 사회성을 함양하는 것은 대학생들의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울러 생활체육의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제도 또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제 672 호 학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 - 모두들 '달라달라'
학교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 - 모두들 '달라달라'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도 전국 각지에서 통학, 기숙사, 자취의 다양한 등교 방법을 이용하는 학생들. 그들의 에피소드와 다양한 주거형태의 장단점을 함께 들어보자! 김수인 기자 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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