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2 호 [책으로 세상보기] 한 스푼의 시간 (2016)
지은이: 구병모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세상에 스며든 로봇 어쩌면 인간이 없는 세상보다 로봇 없는 세상이 더 현실감 없는 상상일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없이 못 사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고, 인공지능 스피커는 이름까지 불리며 대화 상대가 된다. 로봇 청소기는 제 스스로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애착을 받아, 고장이 나더라도 버려지기보다 수리받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무인 인공위성이 우주를 쏘다니는 것을 보면 인간 없는 세상은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 ‘한 스푼의 시간’ 속 동네 세탁소 주인 명정은 아내와 외동아들이 먼저 떠난 자리를 쓸쓸히 지키며 살아간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유학을 떠나 이민까지 가고는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에게 때늦은 택배를 받는다. 상자에 들어있는 것은 열일곱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아니 그처럼 생긴 로봇이다. 명정의 아들이 연구하던 인공지능 로봇의 샘플로, 아들의 죽음과 회사의 도산 이후 떠돌아다니다가 명정에게까지 흘러온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어색한 티가 조금 나지만 제법 사람 구색은 갖추었다. 로봇이 아들 얼굴과 겹쳐 보이는 명정은 로봇에게 ‘은결’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은결은 명정의 세탁소 일을 도우며 함께 살아간다. 세탁소에 사람 노릇을 하는 로봇이 등장하자 동네 사람들은 낯설어하면서도 금세 익숙해진다. 은결 역시 새로운 환경에 점차 적응해간다. 나는 이 모습이 인간의 사회화와 유사하다고 느꼈다. ‘사회화’에는 ‘인간이 사회의 한 성원으로 생활하도록 기성세대에 동화함’이라는 뜻이 있다. 물론 은결은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하며 그에 대해 사고하였다. 일종의 시스템 처리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결국 은결은 인간의 삶을 학습하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없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노화과정을 거치지만 로봇은 부품을 교체하고, 정보를 업데이트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세주가 아기를 낳아 키우고, 꼬마였던 시호와 준교가 성인이 되고, 명정이 숨을 거둘 만큼 시간이 흘러도 은결은 변한 것이 없었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은결과 분명 달랐다. 명정은 은결에게 시간에 대해 말했다.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은결이 영원히 산다는 것도 아니다. 시호와 준교도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손녀를 돌보는 은결은 이제 교체할 부품도 없는 구식 로봇이 되었다. 사실 은결은 스스로 죽음을 택했었다. 명정이 숨을 거둔 뒤 이불빨래를 하다가 넘어진 은결을 준교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은결 역시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비눗물에 몸이 젖고 눈앞이 까매지며 시스템이 강제 종료되는 것을 은결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세제 한 스푼처럼 스르르 사라진 명정을 뒤따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명정은 인간이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세제가 가진 힘에 주목하고 싶다. 고작 한 스푼의 세제는 순식간에 물에 녹아 사라지지만 빨랫감에 스며들어 때를 쏙 빼준다. 그렇다면 로봇은 섬유 유연제 한 컵쯤 되지 않을까 싶다. 빨랫감에 스며든 세제는 물에 헹궈져 사라지지만 섬유 유연제는 바짝 마른 빨래에서 은은하게 향기를 풍긴다. 명정은 세상을 떠났지만 은결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로봇은 이미 세상에 스며들었다. 어쩌면 인간보다 더 깊게 말이다. 홍연주 기자
제 672 호 [상명만평] 항공사 회장님들
황인선(만화·3)
제 672 호 [독자마당] 봉사와 아프리카, 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봉사와 아프리카, 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김보름(문화예술경영·3) 이 글은 한국국제협력단 사업으로 진행된 2018년도 2학기 “영상으로 보는 국제개발협력 이슈” 교과목 수강생 중에서 해외봉사단원으로 선발되어, 2019.01.19.~2019.01.27.(6박9일) 기간 동안 탄자니아 탕가(Tanga)지역 및 차니카(Chanika)에서 현장활동을 수행하고 돌아온 후의 소감이다 봉사란 무엇인가? 봉사(奉仕)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 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 사전적 정의에서 보여지는 핵심은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애쓰는 것’일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희생과 봉사를 동일시해왔다. 나 역시 단순하게 봉사정신이란 곧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희생정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던 중, 탄자니아에서 하루의 봉사일정이 다 끝난 뒤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 식사자리에서 교수님은 이번 현장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만의 봉사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더불어, ‘봉사가 꼭 힘들고 괴로운 것일 필요는 없다. 내가 즐거운 것이 봉사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봉사는 나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면 안 돼. 무조건 나의 편안함과 행복은 후순위야.’ 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봉사활동에 와서 나의 개인적인 편의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죄악인 것 마냥 여겨지던 생각들에 균열이 생겼다. 돌이켜 보니 이유없는 죄책감은 정말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불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봉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봉사란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는 단순한 명제에 맞춘 편견이었다. ‘봉사란 희생이다. 그러므로 희생이 아닌 것은 곧 봉사가 아니다’는 명제로 치환된 단순 정의일 뿐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봉사란 무엇일지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그전까지 봉사의 필연적 요소는 자기희생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필연적인게 아니었다. 봉사자인 내가 행복해야 주위사람들도 행복한 에너지와 기운을 전달받는 것이었고, 내가 즐거울 때 비로소 봉사라는 행위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희생이란 어쩌면 불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봉사란 함께 잘 살기 위한 일이 아닌가. 더불어 봉사자를 곧 희생자로 치환해왔던 내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자들이란, 반드시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다른 봉사자들을 볼 때, 그들에게 희생을 당연스레 요구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머물렀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봉사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봉사의 정의란, ‘함께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행하고 참여하는 행위’이다. 결국 봉사의 본질은 함께 행복하고 함께 잘 살기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사정신이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정신’ 이 아닌, '모두가 함께 공존하며 같이 행복하기 위해 힘을 합쳐 애쓰는 정신'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글로벌화된 현대사회에서 봉사정신이란 과연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정신’일까, 세계시민인 우리가 가져야 할 봉사정신은 과연 과연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정신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과연 지속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정신이 정말 온당하고 타당한 것일까? 결국 우리의 봉사라는 것은 ‘함께 잘 살기 위해 함께 협력하고 협치하여 결국 공공의 이익에 대해 선순환을 이룩하는 일체의 행위’일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다 함께 행복한 것이 우리가 결국 원하는 목표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봉사의 의미이자,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내가 봉사의 정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곤 하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 때문이었다. 빈곤포르노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그리고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편집하는 자료들을 말한다. 아프리카의 빈곤문제를 연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아프리카 사람들도 ‘동등하게 생활을 영유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자료들이 포함된다. 지금껏 매체에서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여줄 때, 대부분 굶어서 영양실조가 심각한 사람들, 야만적인 환경과 비위생적인 관념아래 살아가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그들이 아프리카의 전부인 마냥, 그들이 곧 아프리카인 것 마냥 보여주었다. 이러한 빈곤포르노와 미디어의 행태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우리보다 열등하고 하등하며 불행한 존재, 그렇기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고착시킨다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지속된 자극에 금세 무감각해지는 소비자들 덕에 자극적인 연출과 내용은 그 강도가 더욱 거세어지는 악순환을 가진다. 더불어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는 채로 자극적인 정보만을 주입받는 수용자는 그 프레임을 그대로 장착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이 형성되고 고착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주홍글씨처럼 짙게 남아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곤 한다. 아마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미디어와 빈곤포르노의 영향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그렇기에 처음엔 아프리카에 직접 간다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고, 아프리카에 대해 떠올릴때면 영양실조가 심각한 아이들과 야만적이고 비위생적인 환경아래 살아가는 그들을 자연스레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가서 본 탄자니아의 모습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야만적이지도, 삶이 곧 끝나갈 것처럼 빈곤하거나 위급하지도 않았다.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부 나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문화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활을 영위하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더불어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에서 꽤나 잘 사는 편에 속하는 국가였다. 특히 다리에스살람 공항에 도착하여, 차를 타고 탕가마을로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7 시간을 내달려야 하는 긴 이동시간 동안 버스 창문 너머를 구경하던 중, 커다란 나무 옆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문득 궁금해졌다. 살아가는 환경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이 대화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아마 헤겔과 칸트 같은 류의 철학적 담론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잇달았다. 우리가 흔히 지적인 대화라고 일컫는 종류의 대화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대화가 우리의 대화보다 열등할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유명 철학자들의 철학과 다양한 교육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아이를 키운 부모와,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지라도, 자신들의 인생의 철학과 지혜로 아이를 키운 부모. 우리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부모라고 감히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가? 더 고차원적인 지식이 내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자의 부모를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아래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삶이 불행할 것이라 생각한 건 모두 나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아니 이는 선입견을 넘어, 그릇된 고정관념이자 크나큰 실수였다. 편견, 선입견은 모두 볼 견(見)자가 들어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바르게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가서 보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본다는 행위란 단순히 시각이라는 감각을 넘어서서, 나만의 관념과 철학을 통해 세상을 수용하고 고찰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인생의 경험들을 통해 내 가치관과 생각들을 정립하며, 쌓아온 가치들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현장활동을 통해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사유하며, 많이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많이 보고 경험해야만 선입견에서 탈피할 수 있으며, 많이 듣고 사유해야만 비로소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활동을 통해 나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서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만의 가치로 바라보고, 숨어있는 진짜 문제들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올바른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목표 말이다. 광고기획이란 결국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합적 솔루션을 제시하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앞서 먼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점철된 시야는 진짜 문제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 것 이며,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책 '오만과 편견' 에서는 “오만은 타인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편견은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탄자니아 현장활동은 나로부터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에 대해 한 발짝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기회였다. 비록 넘지는 못했을지 언정, 적어도 무엇이 편견이고 선입견인지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경계하며, 올곧은 시야를 가지는 기획자가 되고자 한다. 덧붙여 다른 사람들도 함께 세상에 대해 바른 시각과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기획자가 될 것이다.
제 671 호 [독자마당] 이해와 공감의 오인, 젊은 꼰대
유 승 현(역사콘텐츠학과·3)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능력의 문제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저자인 정문정 작가의 말이다. 예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고개를 갸우뚱했겠지만 지금은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꼰대라는 단어가 늙은이, 기성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다면 요즘에는 그들만큼이나 나이대가 엇비슷한 또래 꼰대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필자는 특유의 허세와 과시로 무장한 그들을 대하는 게 불편했고, 머리로 이해하기란 더더욱 힘들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본인도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남는다. 꼰대는 어디서든 환영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이기에 ‘젊은 꼰대’는 어린 나이에 찾아온 불치병 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꼰대를 싫어하면서도 젊은 나이에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대학생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꼰대의 특징을 꼬집은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술만 마시면 시도 때도 없이 ‘나 땐 말이야~’라며 군대 얘기를 시전하는 복학생, 과도한 예절과 서열 중시를 강요하는 꽉 막힌 선배, 타인의 개인사에 지나치게 관심 가지고 훈계하려는 동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게 20·30대 젊은이들이 젊은 꼰대가 되는 건 태생적으로 내재된 본인의 성향일 수도 있고 각박하고 치열해진 사회 분위기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아가 그 다름을 문제시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 한술 더하면 그들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바로잡아주려고 도 넘는 참견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글의 서두에서 정문정 작가가 이야기한 공감능력의 부재도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적인 배경과 대학생에서 사회 초년생을 거치는 상황적 배경을 고려해봤을 때, 젊은 꼰대는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먼저 또래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이 강하다는 점이다. 자신은 험한 입시,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앞가림도 나름 잘 해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자기보다 낮은 학벌을 가지거나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한 친구들을 답답하고 불쌍하게 여기며 스스로를 성공한 인생 우등생이라고 자부한다. 그들에게 남들이 현재 어떤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디자인하는지 보단 당장 눈앞에 보이는 요소들을 잣대로 본인이 그들보다 앞선다고 여기는 것이다. 나아가 마치 본인보다 아래라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을 교화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의무감에 젖은 채 행동하는 것 같다. 둘째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꼰대짓에 진심을 담는다는 점이다. 본인은 다른 사람에게 교훈, 가르침을 주려고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여기는데, 물론 의도야 좋겠지만 그것을 듣는 사람은 본인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실제로 충고, 애정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대다수의 것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다. 서로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인간관계란 축적된 시간의 양이 많다고 마냥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도 상대방의 모든 것을 정확히 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설령 본인이 정말 맞고 상대의 행동이 틀리다고 해서 이를 지적할 때 그 결과가 좋을지도 항상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이와는 별개로 ‘꼰대’라는 단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통용되 행태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의미가 의미인 만큼 단어를 오용하여 자신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는 상대방에게 무작정 꼰대라고 매도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실제로 꼰대짓을 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젊은 나이에 꼰대라고 낙인찍히면 그 이미지를 벗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업무상 상급자가 정당한 지시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랫사람의 눈치를 보고, 선후배 간 교류는 고사하고 화를 피하고자 서로 무관심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무엇이 꼰대 짓이다.’라고 생각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기에 그 단어를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단어의 편리성과 파괴력을 알기에 우리는 더더욱 이 단어를 애용하는 것 아닐까.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히 ‘꼰대다, 아니다’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있어 본인만의 대인관계 기준을 확실히 정하고 소신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이를 의식해서 타인의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지도 말고 내 주관적인 견해를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말고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절대로 100%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 설사 내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타인의 주관에 깊숙이 개입하는 순간 그것은 관심이라는 이름의 송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제 671 호 [교수칼럼] 삶의 여정과 목표
삶의 여정과 목표신입생들이 입학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대학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나요? 재학생 여러분들은 학년이 올라가고 후배는 늘었는데 대학생활을 잘 꾸려가고 있나요? 친구들과 여행갈 때면, 누가 얘기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짐을 꾸리지요? 대학생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입생의 경우를 예로 들어 얘기해 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졸업한 고등학교까지의 생활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남들이 제공해 주는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고 공부를 하면 됐습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동적으로 쫓아가고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리라 봅니다. 신입생들이 입학하고 학교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겪는 큰 고민 중의 하나는 철철 넘치는 시간과 자유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입시공부하면서 꿈꾸었던 여유와 자유를 이제 얻었는데 왜 만끽하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여 있을까요?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해 나간 경험이 없기 때문에 갑자기 주어진 여유와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 스스로 계획하고 일구어 나가야 합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삶을 만들어 나간다는 적극적인 사고와 실천의지가 필요합니다. 입시공부 할 때처럼 수동적으로 수업만 듣는 대학생활을 해서는 곤란합니다. 수업에는 수많은 조별활동과 발표가 있고, 수업 외에도 학생회·동아리·소모임 등 활동할 공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이 열려 문화적 욕구를 충족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갖가지 활동거리들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학년이 되어서도 자신이 뭘 좋아하고 잘 하는지를 몰라 답답해하기 전에 1학년 때부터 다양한 경험을 해 보면 서 잠재되어 있는 자신의 자질을 일깨워 보면 좋겠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확립하는 것도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소통할 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학생회 임원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학생들의 참여도가 급격히 떨어져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행사를 못해서 걱정이기도 하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학생들의 편향된 개인주의입니다. 젊음의 열정을 자기 혼자만의 좁은 테두리 안에 가두지 말고 동기·선후배들과 어울리는 대인관계 속에서 발산해 보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혼자 할 때보다 훨씬 큰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 재미있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장래희망이 뭐냐?’, ‘삶의 목표가 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럴 때 뭐라고 대답하나요? 보통 자기가 원하는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부자가 되는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부자가 되기까지 내 삶의 과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그야말로 과정일 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한 과정 한 과정이 모두 내 삶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다 내 삶이라는 얘기지요.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는 내 삶에 동기부여를 해 주고 추진동력이 되어 주지만 그것만을 향해 질주해 나간다면 힘겨움의 연속일 겁니다. 힘겨움 끝에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허탈해지거나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또 다시 질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도 내 삶의 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작지만 한 단계 한 단계 이루어나가는 성취감을, 수시로 닥치는 힘든 일에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가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면 우리 삶의 행복지수는 한층 높아질 겁니다. 여행을 할 때, 목적지에서 인증샷을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 것은 반쪽짜리 여행이지요.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이르는 여정에서 만나는 가지가지 인정풍물들이 여행을 풍요롭게 하고 재미있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생활을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스쳐지나가는 여정으로 여기지 말고 여정이면서 목표라는 생각을 가지고 젊음의 열정을 발산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나요? 혹시 대안 없이 안주하고 있거나 현실을 원망하면서 차일피일 하고 있지는 않나요? 현실의 무게가 우리 어깨를 짓눌러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한 발 두 발 내딛다 보면 시원한 바람도 불어오고 샘물도 만나게 될 겁니다. 나른한 베짱이의 편안함보다는 부지런한 개미의 성취감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대학시절은 비유하자면 꽃나무의 개화기와 같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꽃다운 시절이 지금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의 시기이지요. 이런 시절을 스쳐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으로만 보내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꽃을 피우려면 가장 꽃답게 피워야 그 열매도 튼실합니다. 땅으로부터 갖은 영양분을 골고루 빨아들인 나무가 탐스러운 꽃을 피우듯이 여러분도 대학생활을 통해서 부지런히 삶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바랍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듯 꽃다운 여러분의 청춘 여정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최상은 교수 (한국언어문화학과)
제 670 호 [상명만평] 흑백의 기적
황인선 (만화 · 3)
제 670 호 [책으로 세상보기] 프랑켄슈타인(1818)
지은이 : 메리 셸리 출판사 : 문학동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생명은 사전적으로‘생물로서 살아 있게 하는 힘’이라고 정의된다. 생물은‘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라고 사전에 나타나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단어가 아직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전적으로 정의내리지 않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생명은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이다. 그 주어는 인간과 동물, 식물 모두 해당된다. 그렇다면 메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의 생명은 과연 아름다울까. ‘생명 존중’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논리였다. 동물은 인간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동물의 생명 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생명을존중하는것도‘, 인격’을 가진 생명체에만 해당했다. 그럼 인격을 가진 생명체는 무엇일까. 여기에도 배제된 인간이 매우 많다. 유색인종, 하층민, 노예,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은 해당하지 않는 인간이다. 생명의 범위는 풍선처럼 그 범위가 축소 혹은 확대되기를 반복했다. 이것은 배제와 혐오의 기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생명이하’인사람들, 혹은 ‘생명’의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는 까닭은 생명의 범주를 인간이 정 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혐오한다. 『프랑켄슈타인』에서의 괴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형태로 창조되었고, 어떠한 보호도 없이 홀로 내던져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정의할 시간과 능력도 부여받지 못한 채 혼자 남겨진 것이다. 과연 괴물이 행한 폭력의 책임을 전적으로 괴물에게 돌릴 수 있을까.『 프랑켄슈타인』에서의 괴물은 자연 발생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생명을 지니고 있다. 괴물은‘생물’일까. 현실로 돌아와서, 인간이 만들어낸 AI은 과연‘생물’일까. 아직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 수준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창작물 속의 기술은 점점 현실로 다가 오고 있다. 예컨대 영화 ‘에이리언’, ‘ 매트릭스’에서 인간을 지배하게 된 AI 들은 감정은 몰라도 사고하며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생물일까. 생명과학 분야에서 인간의 감정은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며 생명 또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나왔다. 수많은 학자들이 이야기 한 관념론도 그저 과학적 반응에 불과하며 이들의 행위, 생각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실재하지 않는 과학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기원, 인간의 창조주가 누구인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기존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 제법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인간도 AI, 괴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윤리와 도덕 또한 실재하지 않는 것이고 생명이 생명이 아닌 것이 된다면 상대를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 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명존중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행위이며, 행위는 학습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명이 원리가 위와 같이 밝혀진다면 왜 지켜야하는 지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을 넘길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유기체를 창조하고 생명의 범주를 변화시키는 일이 현실이 되기 전에 사회발전과 인류의 행복을 외치는 과학적 행위에는 인문학적인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다. 이해람 기자
제 670 호 [독자마당] 우중(愚衆)에서 대중(the popular)으로
<문학과 대중문화>-황선애 교수 첫 만남 황선애 교수님의 ‘문학과 대중문화’는 아껴둔 초콜릿 같은 강의였다. 강의평가도 좋고 수업내용도 평소 관심 있던 분야라서 막 학기에 들으려 아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대와 함께 아껴두고 있었던 만큼 강의는 초콜릿처럼 달콤했다. / 강의 방식 초기 수업은 강의식으로 진행된다. 교수님의 열정적인 강의 덕분에 대중문화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강의식 수업이 몇 주 이어지다 중간고사를 전후로 학생들의 발표도 함께 병행하게 되는데 발표는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을 받아 한다. 발표를 하지 않은 학생들은 학기말에 비평문 과제로 대체한다. 의무적인 발표가 아닌데다 주제도 수업 범위 내에서 본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서인지 발표에 쏟는 학생들의 열정이 남달랐다. 나 역시 ‘덕후를 찾습니다.’ 코너에서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에 대한 발표를 맡았는데 좋아하는 주제를 발표한다고 생각하니 준비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한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나면 학생들의 Q&A 시간이 이어지는데 질문을 꺼리는 학생들의 특성(?) 때문에 질문을 할 경우 가산점이 있다. 가산점으로 인해 간혹 무의미한 질문을 던지거나 작은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공격적인 질문도 발생하지만 대체로 교수님의 적절한 조율 하에 건강한 토론이 이어진다. 발표 이외에도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거나 교수님의 질문에 문답하는 등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형식의 열린 수업이 주로 진행되었다. 또 수업 마지막 주에는 그동안 제출되었던 비평문 중 일부를 공유하고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 / 3 POINT 이 강의를 특별히 ‘멋진 강의’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① 이론과 활동의 균형 대체로 교양 강의는 이론적인 지식 위주의 강의이거나 활동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강의들이 대부분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강의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 강의의 특별한 점은 이론과 활동을 적절하게 조화시켰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이론과 활동의 비율은 거의 50:50으로, 균형 잡힌 수업이 가능했다.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율이 저조한 강의식 수업의 단점과 이론적 바탕이 부족해질 가능성이 있는 활동 위주 수업의 위험성을 모두 보완할 수 있었다. ② 세상을 보는 관점의 확대 강의에서는 주로 대중문화를 보는 관점과 대중문화와 문학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동안 대중문화를 별다른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소비만 했던 이들에게 대중문화를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간은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론적 바탕으로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틀’을 갖출 수 있게 하는 수업이었다.점점 ‘취업학교’처럼 변해가는 대학수업 속, 비판적인 시각을 향유한 지식인을 양성하는 대학 본연의 취지에 충실한 수업이라고 생각되었다. 영화를 감상하거나 발표를 들은 후 진행된 심도 있는 토론도 넓은 관점을 가지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와는 다른 이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나눌 수 있어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깊은 시간이었다.다만 가끔 공격적인 질문들이 있고 발표를 자주하는 사람들이 정해져있다는 부분이 조금 아쉬웠는데,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별 토론’의 방식을 생각해보았다.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양 강의의 장점을 살려 조별로 여러 의견을 깊이 있게 나누는 조별 토론의 방법을 적용한다면 공격적인 질문들도 줄어들고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의견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③ 교수님의 열정과 섬세함 앞서 다양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가장 매력적이고 빛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수님의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늘 정확하게 지켜주시는 수업 시간과 꼼꼼하게 준비된 수업 자료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절로 경건하게(?) 수업에 임하도록 하였다. 사실 교수님께서 엄청난 화술을 구사하시는 달변가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열정적인 수업을 찬찬히 듣고 있으면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그대로 느껴져 어떤 말씀을 전달하고 싶으신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화려한 강의 실력보다도 수업을 향한 열정과 준비성이 좋은 강의를 만드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열정이 크다고 해서 섬세한 부분들이 무시되었다면 결코 이 강의를 좋은 마음으로만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교수님께선 열정과 비례하는 섬세함으로 점수에 민감한 학생들의 심리, 또 남녀갈등이나 세대갈등과 같은 예민한 사회적 이슈들, 수업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 받는 학생들을 모두 고려하여 수업을 진행해 주셨다. 섬세하면서 동시에 열정적인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뜨거운 열정에 작은 부분까지 일일이 신경써주시는 교수님의 섬세함이 더해져 멋진 강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줄 정리 누군가 이 과목을 추천하는 이유를 한 줄로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다면, “비판의식이 결여된 채, 수동적으로 세계를 대하던 현세대의 대학생들에게 경종이 되는, 교양수업다운 교양수업”이라고 말할 것이다. 교수님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중우(衆愚)’가 될 뻔 했던 대학생들을 능동적이고 현명한 ‘힘 있는 대중’으로 설득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위 글은 '내가 수강한 멋진 강의 에세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국어교육과 4학년 이강현 학우의 글입니다.
제 670 호 [기자석] 편집장의 편지
이해람 기자 올해『상명대학보』의 편집장이라는 직함을 받고, 그에 알맞은 책임을 처음 짊어졌을 때 학보를 읽는 독자들과 소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기자석’자리를 빌려『상명대학보』의 지면을 채워나갈 사람으로서 학교와학보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이제야 2019학년도의 첫 신문이 발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할 이야기들이 조금은 성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대학사회의 위기’라는 평가와 함께 ‘학보사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따라서 학보사의 정체성과 방향의 논의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5월 리더십캠프 외유 논란이 ‘에브리타임’에서 쏟아져 나왔을 때 ‘교내 언론은 도대체 뭘 하느냐’는 게시물이 올라왔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필자가 리더십캠프 외유 논란을 취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글은 취재의욕을 크게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학보사의 일원으로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독자들의 눈에는『상명대학보』가‘대학에서 언론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성찰이 보이지 않는 신문으로 보였다는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학사회는 분명한 위기를 맞이했다. 한국대학학회장이‘대학이 폐허가 되었다’고 말하는 등 대학 위기 담론은 2017년 필자가 처음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여러 대학 학보사는 물론 중앙언론의 기사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수많은 대학에서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하거나‘따뜻한 도서관’을 위해 교직원의 생계를 외면하는 등 학내 구성원들의 상생을 좇지 않고 있으며 문화를 선도하던 대학가 문화는 소멸해가고 있다. 과연 누가 대학을 ‘진리의 상아탑’‘, 청년문화의선구자’라고부를까. 학보사 또한 이러한 위기를 공유하고 있다. 대학사회 안에서 공생하는 학생과 학보는 큰 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 만 명이 넘는 재학생 중 몇 명이나 학보를 읽을까. 캠퍼스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가판대에는 예전에 배포된 이전 신문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짜장면 먹을 때라도 신문을 가져가줬으면 좋겠다”는 후배 기자의 한 마디에 학보의 현실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 위기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학보사가 질 높은 기사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년 간 학보사에 있으면서‘내가 과연 건강한 사명과 책임을 가지고 기자생활을 해왔을까’라고 되돌아본다면 남는 것은 부끄러움뿐일 것이다. 대학생의 시선으로 세상과 대학에 필요한 물음들이 학보에 녹아들어 있지 못했다는 반성이다. 두 번째는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소비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튜브,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이‘정보의 바다’가 되어 담론을 형성해나가고 있을 때 학보사는 함께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페이스북의『상명대학보』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드문드문 올라오는 공지 글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학에서 언론이 건강하게 기능하고 있는 학교들을 공통적으로 웹진과 SNS를 운영하고 있고, 기사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실시간으로 피드백 한다. 이제야 웹진이 생긴『상명대학보』의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하다. 위기도 익숙해지면 일상이 된다. 위기를 반성했다면 이를 시정하는 것이 필요 단계이다. 먼저 기자들이 대학과 언론에 대한 깊은 고민을 기사에 담아내고, 이를 독자들에게 익숙한 공간에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존 종이신문에서 다루던 텍스트를 독자들의 수요에 맞출 수 있는 새로운 형식으로 전환하는 노력도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사회적으로도, 우리 대학에도 큰 의미가 있는 해이다. 작년 68혁명 50주년에서, 올해 3.1운동 100주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입시제도의 변화, 대학교육 구조 개편 등 대학의 모습 또한 전국적으로 바뀌고있다. 우리 대학의 학생자치에 관해서는 서울캠퍼스에 3년 만에 총학생회가 들어섰다.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한 제2캠퍼스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학생은 변화를 논의하는 광장의 중심에서 벗어난 경험이 없다. 68혁명은 ‘대학생이 중심이 되었다’는 수식이 붙고, 3.1운동 또한 학생대표의 만세삼창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화에 불을 붙인 것은 언론이었다. 침체되어가고 있는 대학사회를 공유하는 우리 대학은 이를 역행하듯 학생자치를 싹틔웠다. 이를 기점으로 대학문화가 활력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상명대학보』가 학내 구성원들의 광장이 되길 기원한다.
제 670 호 [교수칼럼] 신입생에게 들려주는 개구리 이야기
국어교육과 최홍원 교수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난데없이 개구리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하니, 시작부터 낯설고 의아할 수 있다. 힘들고 고단한 입시를 끝내고 대학에 들어선 신입생들, 그리고 24절기 가운데 만물이 깨어난다는 경칩(驚蟄), 그 사이에 ‘개구리’가 있다.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신입생에게 개구리는 몇 가지 당부의 말을 꺼내기에 알맞은 대상인 것이다. 개구리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연령대에 따라 개구리를 잡고 놀았던 추억을 지닌 이가 있는가 하면, 실물보다는 만화 속 캐릭터가 더 친숙한 이들도 있다. 독특한 외모와 울음소리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주로 인해 개구리로 변했다는 설화가 서양 곳곳에 펴져 있고,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는 이 같은 사유가 만들어 낸 대표적인 작품이 된다. 먼저, 끓는 물에 집어넣은 개구리는 바로 뛰쳐나오지만, 물을 서서히 데우게 되면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져도 변화를 모르다가 결국 죽게 된다는 실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물론 현대의 과학자들은 이와 다른 실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흔히 ‘끓는 물 속의 개구리’로 비유되는 ‘삶은 개구리 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은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놓치게 되면 결국 화를 당하게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대학생활의 낭만에만 빠져서 천천히 끓고 있는 물을 인지하지 못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둘째, 바깥 세상의 형편도 제대로 모르면서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여기서 개구리는 자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대표적인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장자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정작 개구리의 상대역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개구리에게 넓은 바깥 세상을 이야기하는 이는 바로 동해의 거북이다. 천리의 거리, 천리의 높이로도 크기와 깊이를 형용하기 어려운 곳이 바다라고 한다.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곳, 그곳이 바로 바다인 것이다. 이 이야기는 좁은 우물 안에 갇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좁은 우물을 박차고 넓고 넓은 바다를 향해 힘찬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함을 깨닫게 한다. 다음으로 우리 고전으로 옮겨가면 개구리는 또 다른 화두를 던져준다. 오늘날 개구리는 불법 포획이 금지될 만큼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만, 이전에는 잠 못 들게 하는 소음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잠을 깨우고 잠을 못 들게 했던 만큼 옛 사람들이 개구리 울음소리에 반감을 드러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개구리 울음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깨닫게 된 사연도 여러 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인조의 측근이었던 장유(張維)는 시끄러운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서 그것이 제 본성대로 우는 것임을, 그리고 그 울음이 인간에게 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포착해 낸다.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보고 듣고 먹기에 즐거운 사물은 마음껏 이용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없애려 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큰개구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김수항(金壽恒)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면, 인간이야말로 하늘이 부여한 자연스러운 삶을 거부하고 온갖 가식과 허위로 뒤덮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통해 인간과 사물의 관점을 동시에 취해야 함을 들려준다. 그리고 나의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일깨운다. 이옥(李沃)은 이와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떼를 지어 모이면 소리가 나는 만큼,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그런데 찬찬히 다가가서 하나하나 들어보면 한 마리가 내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고 감정도 배어 있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뭉뚱그려 소음으로 들을 것이 아니라, 그 사연과 감정을 읽어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세상의 여러 사람들이 내뱉는 말과 사연을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대고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을 뭉뚱그려 소음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하나의 애환에 귀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소음들로 가득하지만, 관심과 애정이 더해지면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존재가 내는 특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와 같은 속담처럼, 개구리는 여러 관용구에 인기있는 대상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만큼 개구리는 우리 삶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여러 가치와 교훈을 전해주는 대상이 되어 왔다. 신입생 여러분들에게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앞으로 대학 생활은 여러분에게 쉴 틈없이 ‘끓는 물’을 쏟아붓기도 하고, 여러분을 좁은 우물에서 넓은 바다로 끝없이 밀어내기도 할 것이다. 이를 단순히 개구리에게 국한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여 ‘공간을 파괴하라!(stretching space!)’, ‘지식을 재신임하라!(retrust knowledge!)’고 외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주장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생활은 그동안 입시에 매몰되면서 자신만을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폭넓게 바라보고 다르게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나의 편견과 아집 대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다양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 생활은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하나의 삶에 담긴 고민과 사연에 귀 기울이면서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경험하는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희망한다. 여러분에게 개구리는 어떤 대상이며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지를 묻는다. 상명의 가족이 된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하면서 이것으로 그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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