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9 호 [만평] 새학기 시작!
김다엘 기자
제 728 호 2024년도 신년호 표지
2024년도 신년호 표지 김다엘 기자
제 728 호 [편집장의 시선] 당신은 2024년을 어떤 한 해로 보내고 싶나요?
[편집장의 시선] 당신은 2024년을 어떤 한 해로 보내고 싶나요? 어느덧 2023년 달력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면서 한 해가 마무리 된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은 여러모로 설렘이 가득한 달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다음 해에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게 될지 상상을 하며 설레기도 한다. 2024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2023년은 당신에게 어떤 한 해 였나요?’ 우리 모두 한 해 동안 힘든 순간을 보내기도 하고 행복한 순간을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힘든 순간이 왔을 때는 덜 힘들게 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행복한 순간이 왔을 때는 그 시간에 감사하며 소중하게 보내기를 바란다. 올 한 해 각자의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 모두에게 ‘올 한 해도 고생했어요’라고 말을 해주고 싶다. 학보사에 들어오고 694호 학보를 통해 수습기자로서 처음 기사를 썼는데, 어느덧 728호 학보를 학우들에게 보이게 되었고. 정기자와 부장기자를 거쳐 편집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상명대학교 학보사의 편집장이라는 새로운 출발과 함께 ‘편집장’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봤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편집장은 ‘편집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서 편집 업무 전체를 관할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신문, 잡지, 책 등 출판물을 발간하기 위한 취재 및 편집 업무를 총괄하고, 구성원의 활동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편집장의 역할이다. 이에 학우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기구의 편집장이라는 직책의 무게를 느끼며 대학언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보려고 한다. 학보사는 학교의 매 순간을 관찰하고 비판하며 기록하기에, 그 자체로 학교의 역사가 되며,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기에, 상명대학교 학보사의 기자들은 치열하게 고민하고 소통하며 기사를 써내려 간다. 2024년에도 그들의 노력이 담긴 학보를 많이 읽어주길 바란다. 글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당신은 2024년을 어떤 한 해로 보내고 싶나요?' 2024년에 새로운 도전을 하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하며,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고 행복한 2024년을 보내기를 바란다. 정소영 부장기자
제 728 호 [기자석] 잘했는지 모르겠네
[기자석] 잘했는지 모르겠네 학보사에 들어온 지 벌써 2년이 지났다. 그중에서도 편집장으로 활동한 지난 한 학기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학보사에서 활동할 적이면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가지고 자라온 “기자”라는 꿈이 정말로 실현되는 듯한 환상을 꿈꾸게 했다. 하지만 단순히 글을 쓰는 것을 넘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학교의 목소리’라는 역할에서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 생활의 절반을 학보사와 함께 보냈음에도 아직 글에서조차 묻어나는 부족한 점들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 같다. 내가 편집장을 맡게 된 것은 정말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현재 모든 대학 언론이 인력난을 겪고 있듯이 우리 학보사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고, 그저 열정과 욕망으로 뭉친 나는 자만심을 근거로 번쩍 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편집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리 학보사의 방향성을 고민하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미디어콘텐츠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대학 신문의 대상 독자인 20~30대 연령층의 학생들에게는 엄숙한 주제에 딱딱한 문체를 담는 기사의 형식으로 큰 반응을 불러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타 학보사에서는 뉴미디어부를 창설하거나 학보사만의 독자적인 캐릭터를 공모하는 등의 선택 효과를 노리고는 한다. 하지만 국방의 의무를 앞두고 있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그렇게 변혁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대신 나는 나만의 대학 언론의 불씨를 살릴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신문은 막론하고, 우리가 글을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나의 불씨는 그곳에서 시작했다. 나는 학생들이 글을 읽으려면 먼저 재미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능의 선택과목을 고르듯이, 입시 때의 전공을 고르듯이. 각자만의 흥미에서 특정한 행동이 비롯된다. 매일 뉴스를 읽고 청년들의 호응을 이끌 만한 주제를 정리하고, 학생 기자들의 기사 아이템을 검토했다. 그 끝에는 즉석식품 같은 기사가 탄생하기 마련이었다. 몇 개의 기사를 검수할 때면 웃음이 났다. 기자들이 기사를 쓰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글에서 묻어났다. 그리고 그 행복이 독자들에게도 닿았기를 기도한다. 그렇다고 기사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을 지향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학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그 구성원들끼리의 건전한 토론의 장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바이다. 대학 언론은 그 사이에서 정보를 조달하며 상호 간 커뮤니케이션에 이바지하는 것이 하나의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분별한 언쟁은 오히려 건설적인 담론을 방해하는 요소이기에, 학생과 교내구성원의 갈등을 중재하여 둘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하는 것이 또 다른 언론의 역할이다. 결국 재미와 진중함,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것이 지난 한 학기 동안 상명대학교 학보사의 숙제였다. 앞으로의 학보사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는 감히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고 대학도 그것에 반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도 틀림없는 말이다. 학보사가 밟아야 할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앞으로의 소회에도 많은 관심을 주길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기자 생활을 마감한다. 김상범 편집장
제 727 호 [만평]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만평]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김다엘 기자
제 727 호 [기자석] 무의식의 흐름
[기자석] 무의식의 흐름 곽민진 기자 날씨가 부쩍 추워진 요즘 같은 날에는 괜히 글자 하나를 끄적이다 지우고 다시 펜을 허공에 배회하기를 반복하는 감상에 빠지곤 한다. 바깥에 매서운 바람이 흩날릴 때, 건조하지만 후끈한 히터 공기로 덥혀가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것이다. 가을의 어여쁜 낙엽이 하나씩 사그라들 때쯤, 서서히 날씨가 매서워지기 시작한다. 동물들이 겨울잠에 들 준비를 하듯, 우리들 역시 서서히 일 년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학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쉽지 않다. 그것이 굳이 시험과 과제들이 몰아닥쳐 들어오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연말, 한 해의 마무리, 한 학기의 마무리, 무언가의 종말을 뜻하는 시점은 언제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어렸을 적 그 언젠가, 이젠 희미할 정도의 까마득한 어느 낙천적인 이는 새로운 한 해를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진 못할 것이다. 그때는 한 해를 넘기는 게 인생의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듯, 설렜었나. 그때는 한 살을 더 먹어가는 자신이 다 큰 것 같고, 그것이 자랑스러웠었나. 웃기는 일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동일하게 시간은 흘러가는데 왜 그때는 어른이 되는 것을 뭐 그리 바랐는지. 그때의 내가 ‘어른’으로 정의할 즈음의 나이가 되어서 회상하는 어느 날. 어른들이 하시는 고루한 말씀들에 공감할 즈음, 문득 내가 나도 모를 어딘가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점은 너무나 아득하고 희미해서 이젠 내가 그리워하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의 당신이 그리운 건지. 그때의 내가 그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에겐 너무나도 완벽하게 아스라하다. 과거는 미화된다는 말이 있듯이 어쩌면 내 망각의 안배일까.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이라는 망각의 어느 희미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축복마저도 걷어가지 못한 잔해들을 애써 부여잡는다. 그 잔해들을 가득 끌어모은 채 초라하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당신의 미지근한 손의 온도와 나를 잔잔히 이끌던 눈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인생의 첫 종말이자, 유년 시절의 종지부를 찍어낸 당신께 나는 여전히 하루의 독백을 뱉어낸다. 20대의 어느 초입에서,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청춘이라고 일컫는 하루가 어깨를 짓누를 때 나는 여전히 중얼거린다. 누군가는 하루하루를 나아가라며 격려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저 버텨내기에, 제자리걸음의 치열함을 공감한다. 하루의 무게를 모르던 어느 날의 내가 바라던 어른이 되기는 한참 멀었다. 그때의 나에게 반짝거리던 그 여유로움은 몇 겹의 시간을 둘러싸 포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내 곁에 남아있는 수많은 독백에 답하면서 간혹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이다. 곽민진 기자
제 727 호 [순간포착] 촛불 속 우리의 시간
[순간포착] 촛불 속 우리의 시간 어느덧 2023년의 해도 거의 저물어가고 날씨도 제법 겨울 날씨가 되어 패딩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만연해졌다. 이렇게 보면 겨울이 왔다는 것을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유난히도 더웠던 올 여름을 뒤로 하고 이제는 한 해의 마무리를 하며 그동안의 일을 정리하고 다음 해의 준비를 할 시기이다. 열심히 준비했던 과정 속에서 예상대로 흘러가 좋은 성과를 내면 좋겠지만 그러하지 않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다. 고작 20대의 세월에 불과하며 앞으로의 남은 시간이 훨씬 더 많기에 남은 여생 동안 이룰 수 있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 다 끝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노력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올해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나 자신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두터운 우정을 지닌 친구, 사랑하는 연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곁에 있는 이들을 당연한 존재로 여기고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거나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내 곁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한 명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은 그 사람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이번 연말에는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추운 겨울날에도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따뜻함을 선사해주는 그에게 ‘사랑한다’ 한마디를 건네 보는 학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올해를 끝으로 양쪽 어깨로도 부족했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하염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학우들에게 칭찬의 박수를 보내며 그동안 달려왔던 길이 험난했던 것을 알기에 성과의 유무를 떠나 그저 잘했다며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양시원 기자
제 727 호 [교수사설]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위해
[교수사설]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위해 의학사의 거장인 앤드류 스컬의 저서 ‘광기와 문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신건강은 성서에 기록될 정도로 인류사에서 긴 시간 다뤄졌었다. 그렇지만 1900년도 중엽까지도 정신건강에 대처하는 방식은 ‘언덕 위의 하얀집’이라는 표현과 같이 도시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철저하게 환자를 고립하게 만드는 형태였다. 그리고 정신건강에 취약한 이들의 인권유린은 빈번했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그들이 다시 복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2차세계대전 이후 전복되었다. 왜냐하면 전쟁신경증(shell shock)을 앓고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치관에 노골적으로 저항감을 드러낸 여성, 외국인, 사회적 약자 등을 모두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간주해 정신질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배제와 격리가 더 이상 어려워지고, 영국의 정신의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기충격, 전두엽절제술, 신약투여 등과 같은 인습에 저항하는 ‘반정신의학운동’이 확산하면서 제3의 방식으로 정신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 시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로널드 데이비드 랭은 ‘난리법석공간(rumpus space)’이라고 불리는 실험적 치료 환경을 제공했다. 여기에서는 환자와 의료진의 경계가 없었으며, 민주적인 정신을 바탕으로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공간은 조현병 환자에게 특히 효율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 최선의 치료법은 진정한 존중과 소통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용된 이들은 후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했으며, 난리법석공간의 존속을 위해 경제활동에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현상은 실험적으로 약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지했던 이 공간이 사라진 후, 그간 수용되었던 대다수가 다시 정신적 문제를 일으켜 이곳에 다시 돌아오길 희망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난리법석공간의 지리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긍정적인 정동(情動)적 만남’일 것이다. 사실 정동은 낯선 표현인데, 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이면서도 급격히 일어나는 심리적 상태를 뜻한다. 단지, 정동은 느낌, 정서, 감정 등과 같이 개인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 있는 그대로 수용, 진정한 허락 등은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일정한 잣대에 따른 평가, 엄격함, 편견과 거부 등은 부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정동은 심리적이며, 정서적인 특징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체화(somatization)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부정적인 정동적 만남은 알 수 없는 신체적 고통(예: 신경계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현재 우리들은 삶은 어떨까. 안타깝지만 부정적인 정동적 만남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세상 소식만 봐도 그렇다. 경쟁적 관계, 경제위기에 따른 긴장, 적응하기 어려운 변화 등의 사회적 분위기는 깊은 곳에 숨어있는 불안과 긴장을 자극한다. 이뿐일까. 일상생활에서, 특히 매일의 삶이 펼쳐지는 캠퍼스 곳곳에서 느껴지는 무관심, 차가운 시선, 예의 없는 언행, 내로남불식의 이기심 등은 마음을 닫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야만 할까? 랭의 난리법석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생활을 치유의 장(場)으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굳이 종교적 교훈인 불교의 무재칠시(無財七施)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따뜻한 미소, 반가운 인사, 다정한 말씨, 타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 등은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만들 수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산이다. 사실 타인을 대하는 모습은 나 자신을 향한 태도이다. 타인을 향한 친절함은 높은 자존감을, 불손함은 낮은 자존감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또한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뇌의 편도체에 영향을 끼쳐 공포 혹은 불안정 등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더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내가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미 뇌과학에서 밝힌 진실이며, 결국 우리는 일종의 거울효과 속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당장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긍정적인 동정적 만남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2024년은 긍정적인 정동적 만남을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보길 제안하고 싶다. 한층 더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보듬는 환경에서 나와 남이 경계가 없음을 알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결국 모두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아닐지 싶다. 공간환경학부 박수경 교수
제 726 호 [순간포착] 빛나는 인생이 되기를
[순간포착] 빛나는 인생이 되기를 우리의 인생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언제나 성공과 행복만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꽃길만 걷자”라는 문구를 이용해 그 사람의 인생과 길을 응원한다. 실은 이 또한 응원과 축복의 메시지에 불과하며 항상 꽃길만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매사에 신중한 판단을 내리고 두 번, 세 번 곱씹어보며 정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유성은 빛을 내면서 떨어지는 천체를 말한다. 우리 눈에는 항상 떨어지는 모습만 보인다. 그렇기에 추락, 몰락, 패배 등의 좋지 않은 이미지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성은 떨어지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닌 밝게 빛을 내며 먼 곳에서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면도 있다. 또한 지표면까지 타지 않고 도달하면 운석이 되어 문화재로 전시가 되거나 가공하여 값비싼 보석만큼의 가치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유성은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떨어지는 모습만을 보이지만 그 과정을 보자면, 우주를 맴돌던 밝게 빛나던 천체가 지구 사이를 지나치면서 그 궤적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빛줄기로 우리의 눈에 잠시 모습을 비추다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밝게 빛나는 시작이 있었기에 떨어지는 모습도 아름다운 광경을 선사하며 시작과 끝으로 가는 과정 전부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떨어지고 넘어지고 지칠 수도 있는 과정 속에서 담담히 일어나는 법을 배우며 그 떨어지는 모습조차도 아름다운 광경으로 만들어내는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비록 그 시작이 유성처럼 밝진 않더라도 지나치는 모습과 숨을 다하는 순간까지의 과정은 충분히 아름다운 빛줄기로 남을 수 있다. 지금의 나와 먼 미래의 나까지 모두 유성처럼 밝게 빛나는 모습으로 남아있는 학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시원 기자
제 726 호 [만평] 집중!
[만평] 집중! 김다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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